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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381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 Waeran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정유재란,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役),만력(萬曆)의 역(役),임란(壬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조준호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가 부산진을 침범하였다. 조선 관군은 준비가 잘 된 왜군을 당해내기 어려웠고 왜군은 부산진을 침입한 지 보름 만에 서울까지 점령하였다. 급박한 상황에서 선조는 4월 30일 밤에 서울을 떠났고, 왜군의 1번대와 2번대가 각각 5월 2일과 5월 3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 가닥 희망이던 하삼도의 대군마저 서울 수복을 위해 북상하다 용인·수원 사이에서 대패하여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왜군은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까지 장악하고 6월까지 온갖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과 승군이 일어났고 수군의 활약이 이어져 전세를 만회할 길이 트이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의 지휘 아래 적 수군의 주력을 격파한 조선 수군의 활약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조선이 요청한 명나라 지원군은 평양을 수복한 후 계속 남하하다가 서울 근교 여석령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퇴각하였다. 그 와중에 왜군은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군대에 의해 대패하고 화의 교섭이 급진전되어 4월 18일 왜군은 도성에서 철수하여 남해안에 성을 쌓고 화의의 진행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2~3년간 사신이 왕래함에도 불구하고 화의는 결렬되고 14만 1500명의 왜군이 재차 침입하는데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명나라에서도 재차 원병을 보내 조선 관군과 함께 북침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해전에서 완패하여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으로 왜군이 철수하게 되자 조명 연합군이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여 수세에 몰아넣었으나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뇌물을 받아 퇴로를 열어주었다. 해상에서는 퇴각하는 왜선을 이순신이 완파하여 겨우 50여 척만 탈주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용인]

1. 전투 준비

선조가 몽진에 오른 1592년 4월 30일 무렵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군사를 징집하여 근왕을 위해 북상하다가 왕이 이미 몽진길에 오르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공주에서 접하게 된다. 군사들의 동요로 전주로 돌아와야 했던 이광은 다시 4만의 군사를 모아 전주로 집결시켜 2개 군으로 나눈다.

1군은 이광이 이끌며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으로 전 부사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으로 삼아 용안-임천을 경유하고 2군은 전라방어사 곽영(郭嶸)이 이끌고 광주목사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금강을 통과하게 하는데, 이에 경상도순찰사 김수가 군관 수십 명을 이끌고 합류하고 충청도순찰사 윤석각도 병사 신익, 방어사 이옥 등과 함께 8천을 이끌고 온양에서 합류하니 그 병력이 5만이 넘고 군기·갑옷·치중이 40~50리에 가득 찰 정도였다.

5월 26일 출발한 삼도 근왕군은 6월 3일 수원 독성에 입성하고, 수원을 지키던 왜군은 조선군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용인으로 물러나 그곳의 군사들과 합치게 된다.

2. 전투와 패퇴

조선군 수뇌부는 용인에 주둔한 적을 칠 의논을 시작하는데 중위장 권율은 적이 험한 곳에 웅거해 있고 자신들이 이끈 군세의 역할이 중요함을 들어 우회할 것을 권했지만 이광은 이를 무시한다.

백광언이 북쪽 문소산에 작은 적의 진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이광백광언이지시에게 각 1천씩을 주어 공격하게 하자, 권율은 적을 가볍게 보지 말고 대군이 오는 것을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이지시백광언이 묘시부터 사시까지 공격해도 적은 나오지 않다가 오시가 되어 조선군이 기가 풀리자 공격해오니 이지시·백광언과 고부군수 이윤인, 함열현감 정연이 전사했다.

이튿날 조선군이 아침 일찍 밥을 지어먹기 위해 솥을 걸고 불을 피우고 있을 때 적의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선봉의 장수는 쇠탈을 쓰고 백마를 타고 백기를 매고 칼을 휘둘렀는데 선봉의 신익이 그걸 보고 도망쳐버리자 5만이 넘는 군졸들이 장수를 본받아 모두 도망치는 데 급급하였다.

그래서 앞서 전사한 백광언이 군대를 10개 소부대로 나누어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쪽이 구원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건의했으나 숫자를 믿은 이광은 묵살했고 결국 5만 명이 한꺼번에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광·김수·윤석각은 30리 밖에 있었는데 이들도 군사를 추스르지 못하고 도망치니 적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조선군이 버리고 간 산더미 같은 군량·갑옷·마초·병기를 태워버렸다.

이렇게 5만 명의 조선군은 1,600명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군에게 변변한 전투 없이 패퇴하게 되었다. 이 패배로 인해 서울 수복은 커녕 패배감만을 가진 채 하삼도 연합군은 각각의 주둔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평양에 있던 선조가 이 전투가 있은 후 불과 5일 만인 6월 11일에 의주로 떠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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