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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겸과 정문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865
한자 宋之兼-旌門洞
영어음역 Song Jigyeomgwa Jeongmun-dong
영어의미역 Song Jigyeom and Jeongmundong Villag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집필자 정혜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효행담|지명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송지겸
관련지명 정문동
모티프 유형 효자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서 정문동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정문동양지면 송문리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효자 송지겸의 정려문이 세워진 후에 사람들이 부르면서 생긴 지명이다.

[채록/수집상황]

1985년에 채록되어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실려 있다.

[내용]

송지겸의 본관은 야성(冶城)이고 자는 희주(希周)이다. 1769년(영조 45) 11월 27일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9대째 내려오는 독자로 천성이 지효하고 영특했으며, 부친 송표(宋杓)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아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다. 명의로 유명해진 송지겸은 궁중에 불려가 왕의 진맥을 보았다. 진맥을 마친 송지겸은 궁궐을 나와 급히 탕제를 지어 입궐했으나 그 사이 임금이 붕어하자, 임금의 환우를 고치지 못했다는 불충죄를 입기도 했다.

효성이 남달랐던 송지겸은 부친이 살아계실 때 조석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행여 방이 추울 새라 따뜻하게 군불을 지폈다. 언제나 하인을 시키지 않고 손수 이 일을 하였다. 부친이 병이 들자,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곳에 피접처를 정해 간병하였으며, 매일 탕제를 올리기 위해 20여 리를 왕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길을 잃어 헤매고 있는데 범이 나타나 길을 밝혀 주었다. 지성으로 간호했지만 끝내 부친이 별세하자 삼 년 동안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중에 거할 때는 소식(小食)조차 삼갔다.

이렇듯 송지겸의 효행이 부친의 생존시와 조금도 다름없으므로 유생들이 이를 존경하여 다투어 조정에 상소하였다. 그리하여 1791년(정조 15)에 효자 정문이 내려졌다. 1815년 53세의 나이로 죽었으나 그에게 내린 효자 정문은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살던 곳을 정문동이라고 부른다.

[모티프 분석]

「송지겸과 정문동」송지겸의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의 의술적 능력과 효행이 부각되었다. 송지겸의 효행으로 마을에 정문이 세워진 후 마을 이름이 정문동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송지겸은 우리나라의 전통 규범과 같이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후에도 정성껏 모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송지겸과 정문동」 같은 효행담은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하는데, 용인 지역에서도 가장 많이 채록되는 설화 가운데 하나이다. 오뉴월에 연시를 구해 어머니를 봉양한 아들,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은 아들을 산에 매장하려다 석종을 발견한 부부, 시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아들을 호랑이에게 바친 며느리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효행 설화가 많은 이유는 효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일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효자와 효부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널리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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