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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831
한자 旌閭
영어음역 Jeongnyeo
영어의미역 Monument Gate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집필자 이인영

[정의]

경기도 용인 출신의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

[개설]

충, 효, 열행을 표창하기 위하여 정문을 내리는 국가의 특전을 작설지전(綽楔之典)이라고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전편」을 보면, “절의와 선행이 있는 자는 장권한다. 효자와 조부모의 봉양에 성심을 다한 손순(遜順), 절부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우애와 화목을 지켜 칭송을 받는 목족, 가뭄, 기근, 천재지변으로 기아에 처한 백성을 구환한 백성 등은 매년 연초에 기록하여 계주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경우 나라에서 상을 내리고 물품을 주거나 관작을 내리는데, 특이한 경우 정문을 세우고 군역과 호역 등의 노역을 면제해 준다. 또한 부녀자가 남편을 잃은 후 수절하거나 절의를 지킨 자도 복호하였다.

[분포]

용인 관내에는 충신, 효자, 열부, 열녀 등에게 내린 정려가 여러 곳에 전한다. 충신의 경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완, 심대, 안홍국, 유복립 등의 충신 정려문과 병자호란 때 활약한 윤계, 윤섬, 이찬조 등의 충신 정려문이 있다.

효자의 경우, 김영희, 김집, 김치복, 목원규, 박인영, 송지겸, 안기명, 안희중, 오명항, 이계복, 이규헌, 이원복, 이희동, 정응규, 정재위, 정한영, 한구 등에게 정려문이 내려졌고, 특히 이동읍 송전에는 어진혁, 어사랑, 어운해에 이르는 삼대 효자 정려각이 있다.

효열부의 경우, 김달명 처 양주조씨, 박래영연안이씨, 권석기순흥안씨, 김달명 처 양주조씨, 김상동남양홍씨, 김수로상주황씨 등의 정려문이 전한다. 이를 몇몇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황]

1. 김영희 효자정려각

처인구 남동에 위치하고 있다. 김영희는 34세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이 별세하자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상을 마칠 때까지 애통한 마음으로 지냈다. 상을 마칠 때까지 하루도 상복을 벗지 않고 음식을 가려 먹었으며, 3년을 하루같이 묘소를 찾아가 곡을 하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김영희의 효성에 탄복하고 존경하는 등 인근의 사표가 되었으며, 1891년(고종 28)에 마침내 고종이 이를 전해 듣고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로 증직하여 효자 정문을 내렸다.

2. 김치복 효자정려각, 황씨 열녀정려문, 권씨 효부정려문, 조씨 효부정려문

1831년(순조 31)에 명정된 김치복의 효자정려문으로부터 1860년(철종 11)에 명정된 권씨 효부정려문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김씨 일문에서 나온 효자, 열녀, 효부정려문이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었다.

김치복은 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상을 당하여 행실이 돈독하므로 사림이 다투어 천거하여 1831년(순조 31)에 정려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열녀 황씨는 김치복의 아들 김수로의 처로서, 지아비가 죽자 일체의 음식을 끊고 7일 만에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 이러한 열부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열녀정문이 내려졌다.

효부 조씨는 김치복의 손자 김달명의 처로 남편과 함께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상을 당해서는 음식을 가려 먹으며 효성으로 3년상을 치루었다.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52년(철종 3)에 효부정문이 내려졌다. 효부 권씨는 김치복의 증손인 김유성의 처로 시아버지가 병으로 위중하자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하여 이 병을 낫게 한 공로로 효부정문이 내려졌다.

3. 목원규 효자정문

목원규는 본관이 사천으로 평소 몸가짐이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사표로서 칭송을 들어, 그가 죽은 지 18년 만인 1891년(고종 28)에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로 증직하여 이듬해에 효자정문이 내려졌다.

목원규는 부모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극진히 간병하였고, 상을 당했을 때는 애통한 마음으로 장례를 치른 후 1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3년 동안 하루같이 묘소를 찾아 곡을 하였다. 또한 가세가 곤궁하였지만 어려운 친척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등의 아량을 베풀었다. 이에 유림들이 죽산부사에게 탄원하여 마침내 효자정문이 내려졌다.

4. 심대(沈岱) 정려각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충장공 심대의 정려각으로서, 전면 오른쪽에는 근래에 세운 심대의 신도비가 있다. 정려각은 원래 1779년에 세워졌으나 낡고 퇴락하자 1972년 심대의 묘소가 경기시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1975년 중창하였다.

현재 정려각 내부에는 심대의 위패를 모신 감실이 중앙에 있고, 충신 정려문은 서쪽에 걸려 있어, 전체적으로 사당의 형식을 띠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재목의 푼수가 작고 간살도 협소하여 아주 작은 규모이다. 전퇴는 기단보다 한 단 높여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내부에는 천장을 들여 원래의 형식을 잃었다. 지붕은 부연을 단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전퇴 기둥 머리에는 익공가지처럼 생긴 부재를 끼우고, 창방 위에는 마치 소로와 운공을 놓은 것처럼 비슷한 형태의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간살에 비해 작고 형상도 조잡하여 장식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있다.

심대의 본관은 청송으로, 임진왜란 때에 경기감사로 어가를 수행하여 공을 세웠으며, 삭녕에서 적의 야습을 받아 죽음을 맞았다. 호성공신에 녹훈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청원부원군(靑元府院君)에 봉해졌다.

5. 안홍국 정려각

조선 전기의 무신인 충현공 안홍국의 정려각으로서, 안홍국선조 초에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병마절제사로 선전관이 되어 어가를 의주까지 후송하였다. 환도 후 호종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다.

정유재란 때 한산 앞바다에서 적을 추격하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1642년(인조 20)에 충신으로 명정되고 병조판서 좌찬성으로 증직되었으며, 정려각이 내려졌다. 정려각은 사방 단칸의 규모로 초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단칸 규모의 건물이지만 격식을 갖춰 지었다. 앞면 중방 이상에는 홍살을 끼워 개방하고 나머지는 벽체로 막았다. 내부 북벽에는 정려문 편액이 걸려 있고, 한쪽으로 정려문 표석이 서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6 행정지명 현행화 이동면에서 이동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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