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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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 末, 朝鮮 初 最大- 王室寺刹, 檜巖寺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서지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24년 - 회암사, 조선 전기 최대의 사찰로 입지를 굳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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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72년 - 정희왕후의 명으로 회암사 중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4년 6월 10일 - 양주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8년~2006년 - 양주 회암사지, 8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 권역을 발굴, 조사 |
소재지 | 양주 회암사지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
[개설]
양주 회암사지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천보산 자락에 위치하며,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왕실 사찰(王室寺刹)인 회암사가 있던 곳이다. 조선 전기의 최대 사찰이자 현재 양주시의 유서 깊은 사적지인 회암사를 그 역사적 내력, 회암사와 인연을 맺은 고승들, 가람의 구조, 유물 들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회암사의 역사 - 고려 말, 조선 초 최고의 왕실 사찰, 회암사]
회암사는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찰(摠本刹)이었으며, 조선 초기인 1424년(세종 6)에 불교계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폐합될 때에도 선종(禪宗) 본찰로 그 위상과 규모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던 고승(高僧)이었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의 승려들이 주석(主席)하였던 최고의 가람이었다.
회암사의 창건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중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1174년(명종 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다녀갔다는 기록을 볼 때 적어도 12세기 후반경에는 이미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가 현재의 양주 회암사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규모의 사찰로 중창된 것은 고려 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이 ‘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天竺國)[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那爛陀寺)와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였고,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그러한 뜻에 따라 대대적인 중창 불사(重創佛事)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인도 출신인 지공은 자신이 불교를 수학했던 나란타사와 회암사의 입지가 매우 유사하여 불교를 중흥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로 지목했다고 한다. 실제로 양주 회암사지는 천보산과 삼각산(三角山) 등이 인접하고 임진강(臨津江)과 한강(漢江)이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지공이 말한 ‘삼산양수지기(三山良水之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고려 말 조선 초 최대의 사찰로 국가의 비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볼 때 인도 나란타사와 그 규모나 위상을 견주어볼 수 있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정치 이념으로 하여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태조는 왕조 창업에 공헌한 불교 세력에 대한 배려가 컸으며 특히 무학을 왕사(王師)로 임명하고 그가 주지로 있던 회암사에서 왕사 접견을 이유로 1393년부터 1398년까지 네 차례의 공식적인 행차를 가졌다. 태조는 회암사에서 숙식(宿食)하기도 하였고, 상왕(上王)으로 퇴위하고 난 후에는 회암사에서 거처하면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회암사는 이와 같이 왕실의 공적인 행차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일종의 별궁(別宮)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회암사는 효령대군(孝寧大君)[태종의 둘째 아들], 정희왕후(貞熹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비롯한 많은 왕실 인물들의 불사(佛事) 후원이 지속되면서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결과 조선 최대의 사찰로 완성되었다. 1424년 회암사는 토지가 500결에 달하고 승려 250여 명이 머무는 조선 최대의 사찰로 입지를 확고히 굳혔다.
효령대군은 회암사 중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세종은 신하들의 불사 금지조치 요구 등 회암사에 대한 배척을 묵살하고 이듬해 회암사에 쌀을 하사하는 등 불교의 중흥을 묵인하였다. 또한 1443년(세종 25)의 가뭄에는 회암사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도록 요청하였으며, 1446년(세종 28)에는 회암사 소속 승려들의 잡역(雜役)을 면제시키기도 하는 등 세종은 효령대군의 회암사 불사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472년(성종 3)에는 세조 비인 정희왕후의 명에 의해 정현조(鄭顯祖)가 13개월에 걸쳐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정왕후는 회암사와 선왕(先王)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유생들이 절에 들어가 난동 부리는 것을 금지하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등 불교 중흥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의 회암사는 국왕과 왕비, 세자, 비빈(妃嬪) 등 왕실 인물들의 기신(祈晨)이나 건강이 악화되면 기원하는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었고, 국왕의 칠재(七齋)를 지냈으며 왕릉(王陵)의 제사도 모시는 등 왕실의 비호 속에 날로 사세(寺勢)가 커져 갔다.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대규모의 무차 대회(無遮大會)[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차별 없이 평등하게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집행하는 법회]를 계획하여 불교 중흥을 꾀하였으나, 무차 대회 직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던 회암사는 숭유 억불의 조선 사회에서 탄압과 비난의 표적이 되어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회암사가 언제 폐사(廢寺)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선조 28년[1595] 조(條)에 회암사를 ‘옛터’로 기록하고 있어서, 명종 대에 유생들에 의해 방화되었거나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한 14세기 후반부터 문정왕후가 불사를 후원했던 1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의 최대 사찰의 위상과 권위는 일단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회암사의 고승 - 지공, 나옹, 무학의 불교사적 위치를 통해 본 회암사의 위상]
양주 회암사지의 서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으로 추앙되는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부도와 탑비(塔碑)가 있다. 이와 같이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들이 회암사에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도 회암사가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위상을 알 수 있다. 흔히 삼화상(三和尙)으로 불리는 지공, 나옹, 무학의 사상과 저술은 그들의 문도(門徒)와 계승자를 통해서 당시 사회에 널리 전법되었으며, 이는 현재 조계종(曹溪宗)으로 법통이 이어지고 있다.
지공은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이다. 인도의 동북 지방 갠지스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Magadha)국의 왕자로 태어나서 8세 때 나란타사 율현(律賢)에게 출가하여 삼장의 교학과 계율 등을 광범위하게 익히고 19세에 졸업하였다. 지공은 동방(東方)의 교화를 목적으로 인도를 서쪽을 돌아 네팔과 시킴, 티베트를 거쳐 중국의 청해(靑海)와 서안(西安)을 거쳐 대도(大都)에 이르렀고, 다시 서남(西南) 방향으로 가서 사천(泗川), 운남(雲南)에 머물면서 교화하였다.
이후 지공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지막으로 원의 수도인 대도로 북상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개경(開京)과 금강산(金剛山)으로 가서 황제를 축원하는 불사를 주관하고 회암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불법을 전파하다가 다시 대도로 돌아가서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지공은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 중국과 우리나라의 불교를 비롯하여 특수한 신앙과 풍습을 두루 익힌 최고의 고승(高僧)으로, 그의 법통을 이어받은 승려들은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당시 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지공의 대표적인 제자이면서 회암사 중창을 본격화했던 인물은 나옹이다. 나옹의 성은 아씨(牙氏)이며, 속명은 원혜(元惠),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그는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회암사에서 수도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1346년(충목왕 2) 나옹은 원나라에 도착하여 고려인이 세운 선종 계통 사찰인 법원사에서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나옹은 원에서 유학하면서 지공으로부터 무심선(無心禪)을 익혔으며, 중국의 강남 지역에서는 당시 중국 불교의 대세였던 임제종(臨濟宗)을 배웠다.
1355년(공민왕 4) 원 황제의 명으로 황실 사찰에서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주재하게 되면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15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귀국한 후에는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고 1372년(공민왕 21)에는 왕사(王師)에 올랐다. 나옹은 스승인 지공에게 배운 새로운 불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철저한 불이(不二) 사상의 토대에서 선(禪)을 이해했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임제종의 선풍(禪風)을 도입하여 고려 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나옹은 1372년에는 국왕의 후원 아래 대대적으로 회암사 중창 불사를 단행하다가, 왕명(王命)에 의해 밀양의 영원사(瑩原寺)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고려 말에 불교는 국가 재정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신진 사대부의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가장 막대한 경제력을 갖고 있던 회암사는 그 중심에 있었다. 숭유 억불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도 무학이 주석하였던 회암사는 위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무학은 삼기(三岐)[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18세에 출가하여,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1346년 부도암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진주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원나라로 와 있던 지공과 나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무학은 귀국하여 나옹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우왕 2) 나옹이 회암사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열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서 거처하였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지상(地像)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1405년(태종 5)에 입적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무학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를 후원하고, 사원전(寺院田)을 하사하는 등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태조 이후에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왕족들이 회암사를 비호(庇護)하였는데, 특히 세종 때 선교양종으로 불교 종파를 정리할 때에도 회암사는 선종의 본산(本山)으로 건재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최대의 사찰로 그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고승들의 활동은 당시의 불교사적인 상황과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회암사의 가람 구조 - 발굴을 통해 드러난 회암사 대가람의 규모와 위용]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는 1998년부터 2006년까지 8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 권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을 통해 드러난 회암사는 천보산의 남쪽 면에 조성된 평지성 가람으로 석축을 계단식으로 쌓아 각 단지를 구별하고 전각(殿閣)을 배치하였다. 석축단을 기준으로 볼 때 회암사는 모두 8개 단지로 구성되는데, 건물 터는 3단지에서 8단지까지만 분포하며 사역의 외곽으로는 2~3단의 석축을 쌓았으며 가장 위쪽에는 와편(瓦片) 담장이 둘러져 있다.
목은 이색(李穡)의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회암사 중창 당시의 건물이 모두 262칸이며, 각 건물의 명칭과 위치, 방향, 규모 등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발굴을 통해 드러난 건물 터의 명칭이나 시대별 중창의 범위 등을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즉 6, 7, 8단지의 건물 터는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의 기록과 부합되는 반면에 5, 4단지의 건물 터는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가 쓰여졌던 고려 말에 대대적인 중창을 통해 회암사 가람이 완성되었고, 이후 조선 초기에는 중심 사역이라 할 수 있는 6, 7, 8단지의 외곽인 5, 4단지에 새로운 건물의 중창이 집중되면서 사찰의 규모가 더욱 커지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양주 회암사지 발굴 조사 결과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양주 회암사지의 중심 사역 단지라고 할 수 있는 8단지에서 5단지까지의 주요 건물 터에 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5단지 이외의 건물 터는 요사채 및 생활 시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 8단지
8단지는 양주 회암사지의 가장 북측에 위치하며 중앙의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있다.
1) 정청 터
8단지의 중앙 축선상에 위치하는 중심 건물인 정청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 구성을 이루며, 좌우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을 한 익랑(翼廊)인 동·서 방장(方丈)이 붙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 객사의 정청과 동·서 익헌(翼軒)의 평면 구성과 유사한 구조이다. 객사는 전패(殿牌)나 궐패(闕牌)를 모시고 의례를 행하는 곳인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유숙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방장은 사방이 1장(丈), 즉 10척(尺)이라는 뜻으로 방장실(方丈室) 또는 장실(丈室)이라고도 한다. 선종 사찰의 경우에는 주지의 거처를 일컬으며 객전(客展), 당두(堂頭)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방장은 사찰의 중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나 경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이와 같이 양주 회암사지의 정청과 동·서 방장의 구조는 다른 사찰에선 볼 수 없는 배치이다. 즉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방장보다 정청이 더욱 상징적이고 중요한 건물로 인식되어 정청의 좌우에 객사의 익헌과 같이 방장을 두고 있으며 사찰의 가장 큰스님과 왕의 거처인 정청이 직접 연결되어 왕래가 가능한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하였다는 태조 이성계와 그의 최측근으로 각별한 교유(交遊)를 하였던 무학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2) 나한전 터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그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을 봉안하여 신앙하는 전각이다. 나한전에는 부처의 제자 가운데 소승(小乘) 최고의 교법(敎法)인 아라한과를 얻은 5백인의 아라한을 모시는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혹은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과 16대 아라한상을 보시는 십육나한전(十六羅漢殿), 혹은 응진전(應眞殿)으로 나눌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의 나한전 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장방형의 구조를 띠고 있으며 기단은 중앙의 정청과 동·서 방장의 석축열과 연결되어 남측 기단을 내었고 저면으로 대장전과 대칭되도록 월대를 설치하였다.
한편, 양주 회암사지 출토 유물 중에는 불구(佛具)로 사용된 청동발이 4점 있는데, 그 중 2점에는 ‘회암오백성전 식기양오육(檜岩五百聖殿 食器[樣에서 나무 목 변이 없음]五六)’, ‘회암오백성전 다기양오십(檜岩五百聖殿 茶器[樣에서 나무 목 변이 없음]五十)’이라는 명문이 있다. 회암오백성전(檜岩五百聖殿)에서 사용된 불구라는 내용이 있는 청동발이 바로 500명의 아라한을 모신 나한전에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회암사의 나한전은 오백나한전일 가능성이 있다. 그 외에도 청동발 중에는 ‘회암십육성전 불전유과기양일(檜岩十六聖殿 佛前油果器[樣에서 나무 목 변이 없음]一)’, ‘회암십육성전 다기양십육(檜岩十六聖殿 茶器[樣에서 나무 목 변이 없음]十六)’이라는 내용이 기록된 예가 있는데, 이 명문에서 말하는 16성전이 나한전과 관련되는지 아니면 조사전(祖師殿) 등의 다른 불전(佛殿)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3) 대장전 터
대장전(大藏殿)은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불교의 삼보(三寶) 가운데 법보(法寶)에 해당하는 대장경을 봉안하는 곳으로 법보전(法寶殿)이라고도 한다. 대개 대장전에는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차나불상(毘盧遮那佛像)을 봉안하거나 설법주(說法主)인 석가모니불상(釋迦牟尼佛像)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양주 회암사지의 대장전 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이며, 그 남쪽으로는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윤장대(輪藏臺)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윤장대를 돌리는 것은 경전을 읽는 것과 공덕이 같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발굴 결과 양주 회암사지 대장전 터는 내부에 방형의 전돌을 깔고 윤장대가 있는 남쪽을 제외한 각 방향으로 단이 높여서 경판이나 소규모의 불상을 안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7단지
7단지는 8단지의 기단 석열에서 한 단 내려와서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면서 사리전, 시자료(侍者寮), 입실료(入室寮)가 위치하고 동서 방향으로는 중앙의 설법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수좌료(首座寮)와 조사전이, 우측에는 영당과 서기료(書記寮)가 배치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설법전을 중심으로 엄격한 좌우 대칭의 구성을 이루고 있어서 설법전은 8단지의 정청보다는 한 단계 격하되었지만 사찰의 중심 건물로서의 위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사리전 터
사리전(舍利殿)은 사리를 봉안하는 전각인데, 그 내부에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을 안치하기도 하고 사리를 봉안하는 별도의 전각을 만들기도 한다. 양주 회암사지의 사리전은 1칸 규모의 방형 건물로서 설법전과 정청 사이에 위치하여 전체 가람의 중심축 선상에 놓여 있다. 양주 회암사지 발굴 결과 사리전 터에서는 고막이가 확인되지 않아서 벽체가 구성된 독립적인 건물이기보다는 설법전과 정청을 연결하는 천랑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후대에 건물을 개보수하면서 생긴 것으로 원래는 독립된 건물로서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을 그 안에 모신 전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입실료 터·시자료 터
입실(入室)은 개실(開室)이라고도 하는데 불가(佛家)에서 제자가 스승의 방에 들어가서 도(道)를 묻는 것을 말하기도 하며 또한 귀족(貴族)이 사찰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양주 회암사지의 입실료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사리전을 중심으로 그 반대편에 시자료가 있는 점을 볼 때 평상시에는 방장에 거주하는 주지 스님을 보필하는 시자(侍者)가 기거하거나 비워 두었다가 정청에 기거하였던 태조를 비롯한 왕실 인물들이 머물 때에는 그를 보필하는 사람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시자료는 사찰에서 고승(高僧)을 시봉(侍奉)하는 시자가 기거하는 건물을 일컫는다. 양주 회암사지의 입실료 터와 시자료 터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동·서 방장과 수좌료의 사이에 시자료를 위치시켜 위계적인 단계를 고려하면서 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3) 설법전 터
설법전(設法殿)은 사찰의 큰스님이나 주지 스님이 부처님의 설법 내용을 대중들에게 풀어서 전하는 기능을 하는 건물을 지칭하는데, 일반적인 가람 배치에서는 금당(金堂)의 뒤편에 위치한 강당(講堂)의 역할을 하였던 건물과 거의 같은 성격을 가진 건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예불 및 기타 의식은 주 불전인 보광전(寶光殿)에서 이루어지지만 큰스님들이 베푸는 각종 의식이나 행사는 설법전에서 열렸던 것으로 이해된다.
양주 회암사지 설법전 터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규모이며 내부에는 전돌이나 구들의 흔적이 없는 점으로 볼 때 마루가 설치되고 그 위로 벽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법전의 남쪽 기단부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할석을 놓고 화단(花壇)을 조성하였다.
4) 조사전 터
조사전(祖師殿)은 불교 종파의 조사(祖師) 또는 사찰의 창건주(創建主) 등을 기리기 위해서 그들의 영정(影幀)이나 소조상을 모시고 제향(祭香)하는 전각으로, 같은 사찰 내에 양주 회암사지와 같이 영당(影堂)이 있는 경우에는 주로 개산조(開山祖)만을 따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한편, 조사전은 서쪽에 위치하는 수좌료와 거의 같은 선상에 위치하며 같은 외벽과 지붕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져서 같은 건물로 보이지만, 조사전은 3칸 건물이며, 수좌료는 6칸 건물로서 주칸의 간격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조사전에는 마루를 깔고, 수좌료에는 온돌 시설을 갖추었다.
5) 수좌료 터
수좌(首左)는 고려 시대 승려 법계의 하나로 국사(國師) 및 왕사(王師)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고승을 말한다. 또한 선방(禪房)의 육두수(六頭首) 중 하나의 직책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때는 선방 내에서 우두머리를 지칭하며, 수좌가 조실(祖室)이나 방장(方丈)의 역할까지 겸직한 경우도 있다. 즉 이런 경우에는 수좌가 선방의 모든 승려를 지도하고 수행에 필요한 선원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주관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 하지만 양주 회암사지의 수좌료는 그 규모로 볼 때 수좌승 한 사람이 사용한 건물이기보다는 여러 명의 수좌승이 함께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6) 영당 터
영당(影堂)은 그 사찰을 창건 혹은 중건하였거나 주석하면서 수행하였던 이름난 고승들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에 제향하는 전각으로 영각(影閣)이라고도 한다. 양주 회암사지의 영당 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각 방향으로 설법전, 입실료, 향화료와 연결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영당 좌측 2칸에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 점을 볼 때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영당의 성격과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므로 후대에 기능적인 필요에 의해서 영당이 개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7) 서기료 터
서기료는 사찰에서 사무를 처리, 취급하는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 기거하는 건물로 과거에는 서기를 서장(書狀)이라 했는데 내외로 나누어 업무로 관장하였다. 양주 회암사지의 서기료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지만, 2차 증축 때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일반적인 사찰보다 건물의 크기가 매우 큰 편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관련 업무가 매우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또 그를 수행하기 위한 사람들과 업무에 따른 공간의 필요성에 의해서 규모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3. 6단지
6단지에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그 북동 및 북서쪽에 거의 같은 규모와 내부 구조를 보이는 지장료, 향화료가 있으며 가장 서쪽 편에는 서승당(西僧堂) 터가 있다.
1) 보광전 터
보광전은 광명(光明)으로 불법을 시방(十方) 세계에 두루 널리 비추는 의미로 대부분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양주 회암사지의 보광전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에는 정면 5칸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발굴 결과로는 정면 7칸 건물임이 밝혀져 후대의 중수되면서 증축된 것인지 잘못 기록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보광전 건물 터의 남쪽에는 월대가 있다. 건물의 남쪽과 동쪽, 서쪽에는 계단이 있어 출입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북쪽으로는 기단의 안쪽으로 1m 정도 전돌이 깔려 있어 통로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서승당 터
승려가 거쳐하는 승당(僧堂) 중에 하나인 서승당 터는 특이한 구들 구조로 인해 주목되는 건물 터이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기단의 남북 길이는 31.8m, 동서 길이는 14.3m이다. 발굴을 통해 건물 터의 내부에는 ‘E’자 형태의 구들 시설 두 개가 남북으로 마주보게 배치된 형태가 노출되었는데, 구들 시설이 바닥면보다 약간 높게 설치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경상남도 하동 칠불사(七佛寺)의 ‘亞’자와 비교된다.
4. 5단지
5단지에서 조사된 건물 터는 모두 9개소이다. 그 중에서 2개소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지이다. 그 외의 건물은 구들 시설이 있는 곳으로 모두 7개소이며, 이곳에서는 부뚜막을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는 점으로 볼 때 생활이 가능한 건축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는 최대의 왕실 사찰로서 그에 걸맞도록 사찰이라는 종교적인 공간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왕실의 별궁(別宮)으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축적인 가치를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건축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함께 살펴볼 수 있으므로 당시의 건축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회암사 가람과 유물 - 조선 왕실 문화의 정수]
고려 말 조선 초 최고의 왕실 사찰이었던 양주 회암사지에는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제388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호]이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52호], 양주 회암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물[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206호]을 비롯하여 회암사지 맷돌[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 회암사지 당간지주[양주시 향토 유적 제13호]가 도·시 지정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양주 회암사지의 발굴 조사 결과 회암사가 번영을 누렸던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던 기와와 도자기 등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주목받고 있다.
1. 기와류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왕실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던 청기와를 비롯하여 역시 궁궐 건축에서 주로 나타나는 지붕마루를 장식하는 특수 기와인 잡상(雜像), 용두(龍頭), 토수(吐首) 등이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인 용이나 봉황이 시문된 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왕실 사찰 회암사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기와류 중 특히 주목되는 예는 청기와와 잡상, 용두, 토수, 취두(鷲頭) 등의 특수 기와를 들 수 있다.
먼저 양주 회암사지의 정청 및 동·서 방장 터 주변에서는 청기와가 출토되었다. 일반적인 기와에 유약을 발라 청색의 색채가 나도록 번조한 청기와는 재료 수급이 어렵기 때문에 번조에 막대한 재정적인 부담이 든다. 그래서 궁궐을 비롯한 왕실과 관련되는 건축물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주 회암사지의 청기와는 출토 지역이 정청이 있는 8단지 주변이며 그 양이 그리 많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왕의 집무 시설로 사용되었을 정청 등의 특수 건물에만 사용되었고, 지붕 전면에 시공된 것이 아니라 용마루 중앙부 등 지붕의 특정 부위에만 올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주 회암사지의 5, 6단지는 사찰의 중심 공간으로 주 불전인 보광전을 비롯하여 주요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특히 건축물의 지붕마루 부분을 장식하는 용도로 제작된 잡상, 용두, 토수, 취두가 출토되었는데, 현재 조선 전반기에 제작된 현존 유일의 예로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이외에도 왕과 연관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용무늬, 봉황무늬를 비롯하여 연꽃무늬, 범자무늬 등이 표현된 다양한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2. 도자기류
양주 회암사지에서는 고려 시대의 청자와 조선 시대의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각종 도기 등 다양한 유형의 도자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쓰임새를 보면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일상용기가 주류(主流)를 이루지만 제사 등에 사용된 의례용기도 있다. 또한 이들은 표면의 장식 수법 또한 매우 다양하여 우리나라 도자기를 개괄적으로 망라해 볼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도자기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예들은 굽바닥이나 내저면에 명문을 새긴 백자이다. 이러한 음각명 백자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예는 ‘내용(內用)’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조선 시대에 왕실의 공납품을 제작하였던 관요가 성립되기 이전에 경기도 광주 우산리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을 새긴 예는 1470~1550년대에 관요(官窯)[경기도 광주 소재]에서 생산된 제품이다. 그리고 ‘좌(左)’, ‘우(右)’, ‘별(別)’을 새긴 예는 역시 관요에서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양주 회암사지 출토의 음각명 백자는 조선 전기 왕실의 막강한 후원을 받았던 회암사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왕실에서 소용되던 최상품(最上品)의 음각 명문백자 이외에도 사찰에 기거하던 승려들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중품(中品)과 하품(下品)에 속하는 도자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굽바닥이나 내저면에 정(釘)으로 명문으로 새긴 점각명(點刻銘) 백자와 글씨를 직접 써 넣은 묵서명(墨書銘) 백자도 많다. 이러한 예들은 회암사의 역사적인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한편, 양주 회암사지 출토 도자기 중에서 의례용기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로는 청자 향로를 들 수 있다. 이 청자 향로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五禮) 명기(明器) 조(條)에 수록되어 있는 향로 도설(圖說)의 정형향로(薡形香爐)와 복발형의 몸체와 작은 삼족(三足)이 매우 흡사하다. 더욱이 이 청자 향로는 15세기 중엽에 관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관요에서 왕실에서 사용되던 금속제 향로를 모본(模本)으로 삼아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주 회암사지 출토 청자 향로와 가장 유사한 향로편은 1552년(명종 7)으로 추정되는 경기도 광주의 번천리 9호 가마에서 발견되었는데, 형태뿐만 아니라 유약이 두텁게 시유된 회색을 띠는 어두운 녹색인 점도 동일하다. 따라서 양주 회암사지 출토 청자향로도 번천리 9호 가마가 운영되었던 시기인 15세기 중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충청도 목천(木川)에서 제작되어 중앙 관청으로 공납된 분청사기 향완(香垸)은 사찰에서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불구(佛具)보다 그 크기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회암사의 규모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의례용기이다.
[양주 회암사지, 그 웅대한 규모와 위상의 재현]
1964년 6월 10일 사적 128호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는 지난 10여 년 간 8차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이색의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 등의 문헌에 기록된 그 웅대한 건축의 규모와 실체를 확인할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의 각종 기사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선 시대 행궁(行宮)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왕족의 안녕과 보위의 존속을 빌었던 국찰로서의 성격을 각종 출토 유물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양주 회암사지 입구에는 양주 회암사지의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 연구, 전시, 교육하기 위해서 양주 회암사지박물관의 건립이 한창이다. 양주 회암사지박물관은 고려 말·조선 초 최대 국찰로서 그 가치와 중요성이 매우 큰 회암사의 역사와 위상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당시 왕실과 관련되는 불교문화를 대변하는 종합적인 연구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다양한 박물관 사업을 기획, 추진하고 있다.
현재 박물관 건축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회암사의 웅대한 규모와 위상을 유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전시 시설을 구축하고 그를 통해 전문적인 대국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의 각종 박물관 사업이 계획,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현재까지 법등(法燈)이 이어지고 있는 회암사와 사적지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 그리고 회암사의 찬란했던 역사를 대변하게 될 양주 회암사지박물관을 통합적으로 연결하여 고려 말, 조선 초 우리나라 최대의 국찰이었던 회암사의 웅대한 규모와 찬란했던 역사·문화적인 위상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