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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607
한자 金遇秋
영어공식명칭 Kim WooCh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태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김우추 니탕개의 난 소탕
활동 시기/일시 1588년 - 김우추 추도의 여진족 공격
묘소|단소 쌍부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일원동 지도보기
성격 무관
성별
본관 해풍(海豊)
대표 관직 병마우후

[정의]

조선 전기 경기도 화성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해풍(海豊). 길주병마첨절제사를 지낸 김수종(金壽宗)의 4대손이며, 부친은 김경(金瓊)이다. 아들은 병마절제사 김형(金瑩)이며, 손자가 김대건(金大乾)·김시건(金始乾)·김이건(金以乾)·김체건(金體乾)이다.

[활동 사항]

김우추(金遇秋)[?~?]는 무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라 16세기 후반에 활약하였다. 「수원부읍지」에는 “무과에 급제하였고 북관(北關)의 우후(虞侯)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즉 함경도의 군사 책임자인 북병사(北兵使)의 보좌관으로서 서열로 따지면 북병사 다음이 어서 아장(亞將)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임무가 막중하였던 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김우추는 ‘니탕개(尼湯介)의 난’부터 두각이 드러났다. 1583년(선조 16) 1월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 니탕개는 조선에 귀화한 자신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주변의 부족을 선동하여 기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경원부성 및 아산보(阿山堡)·안원보(安原堡) 등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여 7개월이나 전투가 지속되었다. 니탕개가 침입하자, 북병사 이제신(李濟臣)은 온성 도호부사 신립(申砬), 부령 도호부사 장의현(張義賢),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군관 김우추 등을 파견하여 적을 소탕하였다. 이때 김우추는 지형이 가장 험하고 맹수가 많다고 소문난 탁두(卓頭) 마을까지 진격하였다가 큰 사상자 없이 귀환하였다. 그 뒤 김우추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승진하였다.

니탕개의 난을 평정한 뒤, 조정에서는 그동안 방지한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鹿屯島)를 개간하였으나, 여진족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다. 1587년(선조 20) 9월 니탕개는 다시 침입하여 농민과 수비병을 죽이고 160여 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조산보 만호 이순신이 패전의 책임으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여진족의 응징을 위한 임무는 병마우후 김우추에게 맡겨졌다. 1588년(선조 21) 김우추는 기병 400여 명을 이끌고 추도의 여진족 33명을 베는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묘소]

쌍부(雙阜)에 묘가 있다고 하는데,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일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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