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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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The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범 |
[정의]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6·25 전쟁 기간 동안에 벌어진 일들과 주요 사건.
[개설]
경산은 6·25전쟁 초기에 ‘낙동강(洛東江) 방어선’ 이남에 위치해 있었고, 인근 영천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2군단이 승리한 덕분에 6·25전쟁 동안 북한군의 진주나 점령을 한 번도 겪지 않았다. 육군 제2군단 본부가 경산군 하양면(河陽面)[지금의 경산시 하양읍]에 있었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보도연맹원인 군민을 포함하여 약 3,500명의 민간인이 정부의 명령으로 군경에 의해 학살되는 참화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전면전을 의도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반도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6월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7월 5일에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7월 25일에 경상남도 하동(河東)-거창(居昌)-경상북도 김천(金泉)-함창(咸昌)-안동(安東)-영덕(盈德)을 연결하는 선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일단 저지하였다. 그렇지만 그 작전선은 지형상의 불리로 여러 취약점을 안고 있었기에 8월 4일 새벽 1시부로 호남지역은 포기하고 경상남도 마산(馬山)으로부터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다부동(多富洞)을 거쳐 영천(永川)과 포항(浦項)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방어선’[일명 ‘워커 라인(Walker Line)’]을 새로 설정하고, 모든 부대는 그 남쪽으로 일단 후퇴하였다.
[경과]
개전 후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은 8월 하순경에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의 조림산(鳥林山)과 고로면의 화산(華山)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는데, 8월 29일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9월 2일에 북한군을 격퇴하고 주요 지점들을 탈환하였다. 이에 북한군 제2군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와 동부를 타격할 ‘9월 공세작전’으로 대구와 영천 일대를 포위 함락하고 부산을 공격해 점령하려 하였다. 그래서 우선은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新寧面)과 영천읍내를 집중 공격하여 확보한 후 포항 또는 대구 방향으로 진출하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를 간파한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 내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하여 적시적소에 투입할 수 있도록 24사단을 경산 일대에 기동 예비대로 배치하였다. 국군도 제2군단 본부를 경산군 하양면 금락리[지금의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의 하양국민학교에 설치하고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으로 북한군 제15사단에 맞서도록 했다.
9월 4일에 북한군 제8사단이 의성~영천 간의 고로면 갑티재[갑령고개]를 통과하여 하양 북쪽의 신녕고개 너머와 영천 북방 12㎞ 지점까지 진출해 내려왔다. 영천 서쪽과 대구 방어선의 동쪽 옆구리를 동시에 파고들려는 의도였고, 실제로 북한군은 9월 6일 새벽 1시에 영천을 기습하여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교두보가 무너질 위기에 봉착했고, 경산의 운명도 어찌될지 모르는 판국이 되어버렸다.
이에 국군 제2군단은 전투력을 증강하고 9월 7일부터 역습을 감행하여 영천을 탈환하였다. 뒤이어 10일부터 13일까지 북한군을 추적하여 괴멸시켰다. 그럼으로써 북한군의 경주 방면 진출을 저지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대구·부산 신속점령’이라는 북한군의 전략적 목표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남 지역인데다 군(郡) 경계 바로 너머의 신녕과 영천에서 국군이 마침내 승전하여 인민군을 패주시켰기에 경산은 6·25전쟁 동안 북한군의 진주나 점령을 한번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결과]
경산 지역이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서 경산 사람들이 전쟁에 무심했거나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1950년 7월 5일 경산군의 20세 청년 엄문욱(嚴文旭)이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치게 하여달라”는 장문의 탄원서를 혈서로 써서 홀어머니의 승락서까지 첨부해 모 육군부대 사령관에게 보낸 것이 화제가 되고 신문에 보도도 되었다. 경산 출신 청년으로 6.25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고 훈장 받은 군인은 군내 읍·면마다 골고루 분포하며 그 수가 적지 않다. 1997년 당시 9개 읍·면에 총 67명이었으니, 읍·면당 평균 7.5명이다. 전사·전상자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경산인으로서 6·25전쟁과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백두산 호랑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육군 대령 김종원(金宗元)이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지원병으로 참전 후 귀국하여 1946년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장교로서 고속 진급을 거듭한 그는 전방에서 북한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고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경남 지구의 헌병대장과 계엄 민사부장으로 활동했지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막강한 권세를 부렸다. 그러나 국회의 ‘거창 민간인학살사건’ 진상 파악을 치졸한 방법으로 방해했고 그 자신이 영덕·거제(巨濟)·양산(梁山) 등지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으니 비판받을 부분이 적지 않다.
민간인 학살은 경산에서도 벌어졌다. 1950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경산면 평산리[옛 이름은 ‘들미’. 현 경산시 평산동]의 코발트 광산 폐광지대에서 도합 3,500명가량의 민간인이 군경의 임의 처형으로 무차별 학살당한 일이 그것이다. 희생자는 경산군·청도군 각 400명과 영천·대구 등지의 200명을 합한 1천 명가량의 국민보도연맹원(國民保導聯盟員)과 정치범 위주의 대구형무소 수감자 약 2,500명이었다. 전자는 예비검속 방식으로, 후자는 군경에 인계되어, 트럭으로 폐광산에 실려간 후 한 줄로 늘어세워져 칼빈총과 M1 총으로 사살되고는 바로 앞의 수직굴로 떨어져 수평갱도에 묻혔다. 갱도가 시신으로 가득차자 광산 들머리의 대원(大原)골에도 시신이 묻혔다.
이 사건은 1960년 4.19혁명 직후에 지역 언론의 보도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경산 지역의 희생자 유족들은 결집하여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도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의 5.16 군사쿠데타와 더불어 유족회는 해체되고 간부들은 붙잡혀가 중형을 받았다. 그로부터 40년 뒤인 2000년에 학살사건의 현장에서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었고, 경산유족회가 재건되어 갱도를 탐사하고 접근로를 열어냈다. 2005년에 국가기관으로 설립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이 사건의 진상조사를 수행하고 공식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2007년에 실시된 유해 발굴 사업을 통해 상당수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대원골은 27홀 규모의 민간골프장이 조성되어 2007년에 개장하면서 그곳의 유해·유골들은 그대로 다시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결과적으로 보면 적시의 낙동강 방어선 설정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격퇴하면서 이후 전황의 주도권을 잡아 총반격의 시·공간적 여건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영천지구 전투에서의 승리는 아군으로 하여금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방어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경산에는 언제라도 투입될 예비대로서 미군 제24사단과 영천지구 중심의 접적전투를 총지휘할 국군 제2군단 본부가 주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의 지원 아래 반격의 교두보를 구축해갔다. 영천지구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유재흥장군 제승(制勝) 기념지(紀念趾)’가 2군단 본부가 두어졌던 하양초등학교 교정에 비석 형태로 세워진 것은 그런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한 것이다. 경산 출신의 많은 청년들도 6·25전쟁에 참전하여 무훈을 세우면서 나라지키기에 일조하고 전사 혹은 부상의 희생도 치렀음이 확인된다. 반면에 정작 경산 안에서는 다수의 주민을 포함한 무려 3,500명의 민간인 학살이 군경에 의해 벌어지고 말았으니, 실로 비극적인 참화였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다. 그 점에서도 동족상잔의 6.25전쟁은 역사적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져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