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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15
한자 南宮爀
영어공식명칭 Nam Gunghye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7월 1일연표보기 - 남궁혁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8월 23일 - 남궁혁 납북
출생지 경기도 이천도호부
성격 목사
성별
대표 경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경기도 이천 출신의 종교인.

[개설]

남궁혁(南宮爀)은 1881년(고종 18) 7월 1일 경기도 이천도호부[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에서 태어났다. 경성[서울]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16세 때 경성으로 올라가 벙커(Dalzell A. Bunker)[방거(房巨)] 선교사의 주선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고, 1901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03년 전라남도 목포해관(海關)[지금의 목포세관]으로 발령이 나 목포에서 생활하던 중에 프레스턴(John F. Preston)[변요한(變要翰)]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하여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1906년 개신교에 입교한 뒤 세관원을 그만두고 1907년 4월 1일부터 목포 영흥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08년 서울 정동장로교회[지금의 새문안교회]에서 김함라(金涵羅)와 결혼하였는데, 김함라는 여동생 김마리아와 함께 고모인 김필례(金弼禮)가 재직하던 서울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김필례는 1918년 최흥종(崔興琮)의 동생인 최영욱(崔泳旭) 의사와 결혼하였다.

남궁혁은 일제강점기 광주 숭일학교 교사로 일하였으며, 금정교회[지금의 광주제일교회]와 광주양림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6.25전쟁 직후 납북되었다.

[활동 사항]

1908년 광주 숭일학교 초대 교장은 프레스턴이었다. 1909년 4월 남궁혁 부부는 프레스턴을 따라 전라남도 광주로 왔고, 각각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16년에는 북문안교회 제2대 장로로 추대되었으나, 1917년 신학에 뜻을 두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일제에 의하여 광주 3.1운동 당시 자택을 모의 장소로 제공한 이유로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1921년 6월 15일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6월 29일 제8회 전남노회(全羅老會)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으며, 금정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제3대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22년 4월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프린스턴신학교 3학년생으로 편입하였고, 1925년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가 되었다. 2년 뒤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29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부터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여러 편의 성서 강해 시리즈도 발표하였다. 1932년 9월 9일 평양 창동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1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킨 이후 조선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외예배당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장로교 임원들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는데, 이에 반대한 평양신학교는 폐교되었다. 1940년 『신학지남』도 폐지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만주 봉천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1950년 8월 23일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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