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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20
한자 崔興宗
영어공식명칭 Choe Heungjong
이칭/별칭 오방,최영종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임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최흥종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1년 - 최흥종 평양신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4~1905년 - 최흥종 광주 양림리교회에서 선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최흥종 순사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최흥종 국채보상운동 참여 및 광주농공은행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최흥종 광주선교진료소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최흥종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최흥종 평양신학교 졸업, 광주 북문밖교회 초대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23~1924년 - 최흥종 광주소작인연합회 대표, 광주YMCA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최흥종 신간회 광주지회장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최흥종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최흥종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최흥종 삼애학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최흥종 한국사회사업협회 위원장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최흥종 호혜원 건립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최흥종 송등원 건립
몰년 시기/일시 1966년연표보기 - 최흥종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최흥종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전라도 광주목
학교|수학지 평양신학교 - 평안남도 평양
활동지 전라남도|전라남도 광주군
성격 목사|사회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간회 광주지회장|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한국사회사업협회 위원장

[정의]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 등을 위해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목사 겸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최흥종(崔興宗)의 호는 오방(五放),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이다. 1907년 세례를 받고 흥종(興宗)으로 개명하였다. 1880년(고종 17) 전라도 광주목[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에서 아버지 최학신(崔學新)과 어머니 국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공씨에게 자랐다.

[활동 사항]

1904~1905년 사이에 기독교에 입문하였으며, 광주 양림리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순사로 근무하였는데, 순사를 그만두며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순사 사직 후 광주농공은행에서도 근무하였다. 1908년 미국 남장로회 의료 선교사 윌슨(Robert M. Wilson)[우일선]을 만나 어학 선생 겸 광주선교진료소[제중원의 전신]에서 일을 하였으며, 교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12년 광주북문안교회[지금의 광주제일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1914년에는 장로교의 선교부와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가 개설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고종의 인산 행렬을 보며 만세 시위에 합세하였으나, 서울에서 체포되는 바람에 광주의 만세 시위에서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920년 6월 출옥을 하였고, 8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광주청년회에 의사원으로 선임되었고, 이후에도 전라남도 광주의 사회운동에 대부분 관여하였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북문밖교회[지금의 광주중앙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장에 선출되면서 사회운동과 교회 활동을 함께 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1928년 4월 6일 조선 최초의 민간 한센병 구제 단체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최흥종은 서울을 다니며 유명 인사들을 설득하여 윤치호, 안재홍, 조병옥,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등 38명의 인사들과 함께 단체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 단체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1937년 최흥종무등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석아정(石啞亭)을 인수받아 오방정(五放亭)이라 이름짓고 그곳에서 허백련(許百鍊)과 어울리기도 하였고, 성경과 도덕경을 읽으면서 지냈다. 무등산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전남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는데, 이는 전라남도 광주와 전라남도 지방의 지역민에 의한 추대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을 개편하면서 정치적 활동과 거리를 두었으나 한센병 환자들과의 삶은 지속하였다. '조선나병환자근절위원회'를 설립하고, 여수 애양원 임시 원장을 맡았다.

1949년에는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 '하느님과 이웃, 나라와 땅을 사랑하자.'는 취지로 농민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삼애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51년 한국사회사업협회 위원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1956년에는 전라남도 나주에 호혜원(互惠院)이라는 자활촌을 건설하였으며, 1958년에는 무등산에 송등원(松燈院)이라는 수용소를 건설하여 결핵 환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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