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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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甘勿川院 |
영어음역 | Gammulcheon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
시대 | 조선/조선,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백덕규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에 설치된 조선시대 국영 숙박시설.
[개설]
원(院)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국영 숙박시설로서 설치 시기나 운영 방법 등은 확실하지 않다. 각 주(州)·현(縣) 내의 관(館)과는 구별된다. 건물은 원우(院宇)라고 했다. 원은 지방 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사원(寺院)에 부속되는 경우가 많아 서로 동일시되기도 했으며, 관리는 승려들이 맡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들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있어 교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국가 권력을 중앙정부와 지방에 효율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설치한 교통 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공무로 여행하는 자에게 숙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의 원우는 고려시대의 사원 또는 선원(禪院)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 소유의 주택 또는 누정(樓亭)을 개조한 것이 많았으며, 그 외 관가 또는 개인이 주관해 원우를 신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은 공무를 위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상고(商賈)나 여행자의 숙식소로 존재했다. 또한 국왕이 지방을 순시할 때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각도 관찰사가 도내의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에서 점심을 먹거나 마필(馬匹)을 교체하기도 했다.
[관련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하는 조선 초기 전국의 원은 1,310개소로, 한성부 4, 개성부 6, 경기도 117, 충청도 212, 경상도 468, 전라도 245, 황해도 79, 강원도 63, 함경도 37, 평안도 79개소에 이르렀다. 김제군·금구현·만경현 관내에 있던 역원의 위치는 각각 다음과 같다.
김제군 관하에는 동원(東院)[재군동 2리 1개소, 지금의 김제시 신풍동 소식골], 원기[재군서 30리, 지금의 죽산면 서포리 원터]가 있었다. 금구현 관하에는 홍인원(弘仁院)[재현남 15리, 지금의 금산면 원평리], 소복원(蘇復院)[재현서 5리, 지금의 금구면 옥성리], 청도원[지금의 금산면 청도리], 감물천원(甘勿川阮)[재현북 6리, 지금의 금구면 금구리], 잠류원(潛流院)[재현남 6리, 지금의 금구면 용복리]이 있었다. 만경현 관하에는 입석원(立石院)[재현남 10리 1개소, 지금의 성덕면 대석리]이 있었다.
[내용]
동쪽은 전주시와 완주군 구이면, 남쪽은 금산면과 봉남면, 북쪽은 용지면과 완주군 이서면, 서쪽은 황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구현의 감물천원은 김제에서 전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이를 지나는 사람들이 묵었던 원으로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오래 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감물천원의 정확한 개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제정되어 1895년(고종 32)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