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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016
한자 金堤廣闊干拓地-東津水利組合
영어의미역 Gimje Gwanghwal Reclaimed Land and Dongjin Irrigation Associ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지도보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대

[개설]

수리조합은 토지나 가옥 소유자가 모여 농지에 대한 관개용 저수지와 제방 따위의 축조·관리 및 수해 예방 사업을 목적으로 조직한 법인체이다. 1925년에 설립된 동진수리조합은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수리조합으로, 김제 진봉 일대 광활한 땅에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실시하여 오늘날 광활면 일대를 조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수리조합은 근대식 농사법으로 개선한다는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일제의 산미 증산 계획의 일환으로, 갈수록 악화되는 일본의 식량 조달을 위해 운영되었다. 한국농어촌공사의 주요 뿌리이기도 한 동진수리조합은 현재 한국농어촌공사 동진지사로 남아 있다.

[식량 수탈의 첨병 수리조합]

일제는 조선의 토지 확보와 수확량 증대를 위해 일본인 농업 기업가를 이용하여 광범위한 토지를 침탈하는 한편 수리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1906년 「수리조합조례(水利組合條例)」, 1907년 「국유미간지이용법(國有未墾地利用法)」 등을 발표했고, 1908년 옥구서부수리조합[지금의 전라북도농지개량조합 구역] 설립을 시작으로 주로 토지 침탈이 심했던 지역에 대규모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1919년까지 15개 조합을 설립하였으며, 관개 면적은 약 405.25㎢에 이르렀다.

1918년 일본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웠다. 그 일환으로 수리조합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17년 「수리조합령(水利組合令)」, 1919년 「수리조합보조규정(水利組合補助規定)」, 1920년 「토지개량사업보조규정(土地改良事業補助規定)」 등을 잇달아 제정하였다. 그 결과 조합 수는 196개, 관개 면적은 약 2,249.19㎢로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산미 증식 계획은 1929년 세계 경제 공황의 여파로 닥친 농업 공황으로 쌀값이 폭락하고, 일본 지주의 조선 쌀 유입 반대 운동이 전개되면서 1933년에 중단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데 이어 1939년 대한발로 식량 확보가 필요해짐에 따라 일제는 1940년 1,616.53㎢의 수리 안전답 조성을 목표로 한 증미 계획을 수립하고, 이 사업의 시행 기구로 조선수리조합연합회(朝鮮水利組合聯合會)를 발족하였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식량 증산이 절실해짐에 따라 증미 계획을 확대하고 새로운 사업 대행 기관으로 조선농지개발영단(朝鮮農地開發營團)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노동력과 자재 조달의 어려움으로 대형 공사는 착수하지 못하고,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는 소규모 공사를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이 시기에 관개 면적은 151%가 늘었다.

1940년 이후 조합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조합들의 합병이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총 관개 면적은 3,537.29㎢이며, 그 가운데 남한이 약 1,866.11㎢로 총 관개 면적의 약 52.3%를 차지했다.

[전라북도 지역의 수리조합]

일제강점기 간척의 역사는 곧 전라북도 지역 간척의 역사였다. 당시 전라북도 지역의 간척지는 일제 간척의 순서와 과정, 방법 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와 일본 기업은 광활한 간석지가 펼쳐져 있던 전라북도 지역 강 하류 유역과 해안가를 거대한 농토를 만들어 낼 천혜의 땅으로 보고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일제는 「국유미개간황무지개간법」을 제정·공포하여 합법적으로 간척 사업을 벌일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1912년에는 토지 사유화를 공식화했다. 1905년 이후부터 일본 기업과 지주들은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1912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라북도 지역 해안가와 강 하류 유역을 사들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하천개수공사시행령」을 발표하였고, 1925년 만경강(萬頃江)동진강(東津江) 하류에 홍수와 범람을 막고 농경지를 개간한다는 구실로 제방을 쌓기 시작하여 1940년 완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불구불하던 물길이 직선으로 잡혔고 물길이 끊긴 거대한 갯벌 지역을 간척하는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전라북도 지역에 진출해 있던 구마모토농장과 하시모토농장, 동척농장, 아베농장 등이 간척 사업을 시작해 동진강 하류의 용북면, 부량면 일부, 백산면, 동진면 일대, 만경강 하류의 대야면, 개정면, 옥산면 일대, 김제 진봉반도 등 금강(錦江)·만경강·동진강 하구에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제방을 쌓아 바닷물의 유입을 막는 근대적 의미의 간척은 군산·김제·부안 등 전라북도 지역 곳곳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고, 김제 지역 광활간척지 역시 이런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 금강·동진강·만경강 하구 부분은 모두 간척지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일제는 이들 강 하구에 단단한 방조제를 쌓아 군산 옥구반도와 김제 진봉반도, 부안 변산반도 연안에 거대한 간척지를 만들었다.

일제는 거대한 간척지를 조성한 뒤 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수리조합을 결성하였고, 기존의 평야 지대는 물론 새로 만든 간척지에 체계적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1908년 12월 전라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구서부수리조합이 만들어진 이후 곳곳에 수리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수리조합은 저수지와 수로를 재정비하는 한편 모자란 용수를 채우기 위해 동부 산악권에서 흘러오는 물로 저수지를 만들어 간척지에 물을 대는 일을 수행했다.

당시 전라북도 지역에서 가장 큰 수리조합은 1925년 8월 29일 결성한 동진수리조합이었다. 김제·정읍·부안에 물을 공급하는 일을 맡은 동진수리조합은 김제 지역의 죽산·진봉·만경 등지의 간척지에도 물을 공급하였다. 1925년부터 제방 쌓기 공사를 시작한 김제 광활간척지는 1928년 동진수리조합에서 완성한 섬진강(蟾津江) 운암저수지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다.

[광활간척지와 간척 농법]

해안을 따라 제방을 쌓아 간석지를 농토로 만드는 작업은 무엇보다 제방을 튼튼하게 쌓는 것이 관건이다. 김제 광활간척지는 일제의 근대적 기술이 총동원되어 조성된 대표적인 간척지였다. 갯벌에 가시롱차를 마련해 돌과 흙을 날라 제방을 축조하여 바닷물을 효과적으로 차단함으로써 1953년 해일로 제방 일부가 유실된 사고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

간척지에서 제방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생산량을 늘리고 질 좋은 쌀을 생산하기 위해 소금기를 제거하는 일이다. 일제는 광활간척지의 소금기를 제거하기 위해 1935년부터 1년간 간척지 제염 촉진을 위한 시험 필지를 운영하여 표면 세척법을 실시하기도 하였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는 대나무를 농토 밑에 박아 넣어 염분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광활간척지 소작인들이 동원되어 시행된 이 방법은 대나무나 나뭇가지를 땅 밑 5m 정도에 가로로 비스듬히 묻어 땅속에 있는 소금기가 대나무를 통해 더 깊은 땅 밑이나 바다로 빠져나가게 하는 원리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이어서 꽤 효과를 거두었는지 광복 이후에도 쓰였다. 광복 후 광활간척지로 이주해 온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민들은 해마다 갯벌 주변에서 자라는 갈대를 잘라 대나무 옆에 길게 깔아 놓아 소금기가 빠져나가도록 했다고 한다.

[광활간척지와 일제의 식민 정책]

갯벌 앞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갯벌에는 염생 식물과 각종 어패류가 지천으로 널려 있던 이곳이 농토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25년 일본 오사카[大阪]의 재벌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郞]가 동진농업주식회사를 만들어 간척 사업을 벌이면서부터이다.

아베는 자기 자본금 100만 엔과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 100만 엔을 더해 총 200만 엔을 들여 지금의 광활면 거전에서 학당까지 10㎞에 이르는 제방을 쌓기 시작하였다.

7년 동안 바닷물을 막고 갯벌 위에 흙을 쌓은 결과 1931년 지도에는 없던 32㎢에 이르는 광활평야가 조성되자, 1929년부터 1937년까지 1가구당 약 19,834.71㎡[약 6,000평]의 땅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헛간 한 칸이 딸린 집 한 채씩을 배당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676가구의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동진농업주식회사는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할 때 1인당 50원씩 적립금을 받았으면서도 이주민들이 광활간척지에서 나가려 할 때는 집과 땅은 물론 적립금도 내주지 않았다. 사실상 광활면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소작인들은 엄격한 감독을 받으면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일을 해야만 하였다. 이 땅에서 나는 쌀은 회사와 소작인들이 반씩 나누어 가졌는데 쌀 생산량이 많지 않아 소작인들은 늘 빈궁함에 시달려야 하였다.

광활간척지 조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 정부에서 아베에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인 100만 엔을 지원해 준 것도 쌀을 일본으로 공출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국 최대의 옥토라 불리는 김제·만경평야 지역에, 쌀 수탈의 전초 기지였던 군산항과 가까운 지역에 간척지를 만든 것도 쌀 생산량을 늘리고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는 데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김제에서 군산까지 포장도로가 개설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일본은 광활면에 많은 공을 들였다. 1928년 동진수리조합이 완성한 섬진강 운암저수지의 물을 끌어 와 광활간척지에 공급하기 시작하였고,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김제간척출장소를 설치하여 쌀 생산량 확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광활간척지는 마치 노예들이 사는 마을처럼 조성되었다. 이는 수로를 따라 일렬로 12채나 24채씩 늘어서 있는 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마을이 아닌, 마치 군대 막사처럼 죽 늘어선 모양이 광활간척지의 목적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행정구역상 광활면의 정식 명칭은 김제군 진봉면으로 은파리(銀波里)·옥포리(玉浦里)·창제리(蒼堤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은 이를 다시 9개 지역으로 나누고 특정한 이름이 없이 단지 1답구[宅], 2답구 하는 식으로 모두 9답구를 지정하였다. 이곳에서 정착민들은 휘몰아치는 거센 바닷바람을 거적 하나로 막아 내면서 쌀 생산에 내몰렸고, 농업용수를 식수로 쓰는 빈궁한 생활을 이어 가야만 하였다.

식민지 기간 동안 쌀 생산의 전초 기지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던 광활면의 소작인들은 1945년 광복을 맞은 뒤 15년간의 농지대 상환을 통해 자작농이 되었다.

[동진수리조합 설립 과정]

일본인 아베 후사지로는 김제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터라 이 일대의 지리 조건에 밝았다. 아베는 동진강 하류 일대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던 황폐한 갯벌을 간척할 계획을 세웠다.

이 땅은 이전에 이미 몇 차례 간척이 이루어졌던 곳이지만 용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실패하고는 하였다. 따라서 갯벌을 간척하려면 무엇보다 용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였다. 그러나 수리조합의 설립이 좌절되면서 간척 사업도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1924년 전라북도 지역을 휩쓴 큰 가뭄으로 동진수리조합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일본에서는 자국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 산미 증산 계획 장려책에 박차를 가하면서 간척 사업 여건이 다시 조성되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쌀값이 폭락하고 간척 사업이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또 다른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조선총독부에서 간척 사업의 추진을 독려하고 여러 행정적 편의를 봐 주는 등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1925년 마침내 동진수리조합이 결성되고 간척 사업이 시작되었다.

1926년 본격적인 제방 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 총 길이 약 10㎢의 제방이 완공됨으로써 총 17.85㎢[약 540만 평]에 이르는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맨손과 지게로 흙과 돌을 날라 바다를 막는 방조제를 쌓았고, 수년에 걸쳐 갯벌에 물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여 소금기를 없애고 작물을 심는 땅으로 만들었다. 동진농업주식회사는 이렇게 만들어진 땅에 이주민을 모집하여 대규모 쌀 농장을 경영하였다.

[이주민의 땀과 눈물이 밴 광활간척지]

제방이 완성된 뒤 1928년부터 일부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이듬해부터 이주민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논이 만들어지는 진도에 맞추어 경작 면적을 확장하여 1929년 11가구, 1930년 130가구, 1931년 68가구, 1932년 32가구가 이주하여 1932년까지 총 343가구의 이주가 완료되었다. 소작 이주민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였고, 소작은 3년을 1기로 경작 계약을 하였다.

바닷물을 막아 드러난 갯벌을 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넓은 들에 물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여 땅에 배어 있는 소금기를 없애야 하였다.

방조제를 완공하고 소금기를 빼는 도중에도 약 4.96㎢[약 500정보]의 땅에 농사를 지어 약 8,000석의 수확을 올려 꽤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김제간척출장소를 설치하여 날마다 염도를 측정하고 땅의 상태에 따라 종자를 개발하는 등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였다.

간척지에서 이루어지는 쌀 생산은 전적으로 소작인들의 노동의 결과였다.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나무 한 그루 없는 벌판에서 추운 겨울에도 논의 소금기를 빼기 위해 물일을 해야만 하였다.

병충해를 막기 위해 아이들까지도 벌레를 잡는 데 동원되었다. 특히 이화명나방은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해충으로, 학생들에게 논 가운데 촛불을 켜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이화명나방을 잡아 오는 숙제가 주어졌고, 목표량을 반드시 채워야 하였다.

각 호마다 주어진 농토가 있었으나 농사는 대부분 공동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무조건 한 집에서 2명 이상 공동 노동에 참여해야 하였고, 부모가 아프면 아이들까지 동원되었다. 고되게 노동을 해도 소작인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출의 절반은 농장 측이 가져가고 나머지에서 다시 비료 대금이나 영농비 따위를 빼고 나면 실제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양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쌀 공급 기지로 만들기 위해 간척과 개간에 열심이었고, 새로운 땅이 생겨나면 그 땅에 이주민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동진농업주식회사 초기 계획에 따르면, 김제 지역 간척지의 경우도 관보를 통해 각 도에 공고를 해서 모집하려고 했으나, 제방을 쌓거나 염분 제거 작업에 동원되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주를 원했고, 주변의 인구만으로도 충분하여 공고의 방식은 취하지 않았다. 그래도 전국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동진농업주식회사 초기 계획은 이주민이 각자 집을 지어 이주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간척지의 현황에 맞추어 회사에서 집을 지어 나누어 주었다. 이에 따라 농장에서는 소작인들이 들어오게 되면 수숫대를 엮고 흙으로 바닥과 벽을 바르고 초가를 얹은 상자 같은 집을 지어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건축비 가운데 정부 이민 보조금 5원과 회사 보조금 약 30~40원을 농장측이 부담하였고, 나머지 50원을 이민자들이 부담하여 연부 상환하여 회수하도록 하였다.

농장측이 발행한 김제 간척지의 역사서인 『간척칠년소사(干拓七年小史)』의 이주민 관련 항목에는 다섯 가구를 한 조로 하여 이민촌을 구성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여섯 가구가 한 조였다고 한다. 현재 광활면에 있는 집들의 형태는 개축이 이루어져 많이 변했지만 마을 구조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구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농장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일종의 면접시험을 치렀으며, 대부분 신체 건강한 젊은 부부들이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농장에 들어가면 최소한의 굶주림은 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가족과 함께 지게나 수레에 짐을 싣고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 자리 잡은 상자 같은 집에서 새 삶을 시작하였다.

[광활면의 현재]

전 지역이 간척지로 이루어진 광활면은 2009년 11월 현재 면적은 32.09㎢이며, 총 808가구에 1,775명[남자 918명, 여자 85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면 소재지는 옥포리이다. 1949년 진봉면의 남쪽을 갈라 은파리·옥포리·창제리를 분할하여 광활면을 신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에 농장 관리 기구들이 모여 있던 농장 센터 구실을 한 옥포리는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한 지역으로 집을 지을 때 터 돋움을 하였으나, 그 밖의 지역은 간척지를 조성한 뒤 임의로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 구획을 하고 직사각형 농경지와 수로와 농로를 따라 똑같은 규모의 일자이간형(一字二間型) 가옥을 마을 가운데 열촌형으로 조성하여 여느 농촌과는 입지와 형태가 사뭇 다른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경관을 볼 수 있다.

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최근에는 딸기·유채 등 수익 작물의 온실 재배도 늘어나고 있다. 죽산면에서 진봉반도를 일주하는 도로가 개설되어 김제·만경 등지와 연결되는데, 본래 이 도로는 농장을 관통하던 통로였다. 교육 기관으로는 광활초등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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