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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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源 書院 |
영어공식명칭 | Yongwon Seowon Confucian School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어인길 41[용산리 15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하종한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686년 - 용원 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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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 시기/일시 | 1868년 - 용원 서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
이전 시기/일시 | 1887년 - 용원 서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로 이전 복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1년 - 용원 서원 사당 모현사 복원 |
현 소재지 | 용원 서원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157 |
원소재지 | 용원 서원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서변리 |
성격 | 서원 |
양식 | 익공 양식 |
관련 인물 | 모계(茅谿) 문위(文緯)|월담(月潭) 변창후(卞昌後) |
소유자 | 문창만 |
관리자 | 문창만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서원.
[개설]
용원 서원은 임진왜란 때 향토 의병장인 남평인 모계(茅谿) 문위(文緯)[1554~1631]를 제향하는 서원이다. 문위는 1554년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39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거창에서 의병 활동에 나섰으며, 선무 원종공신 3등의 서훈을 받았다. 유성룡 등의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문위가 타계하자, 고을 사림이 1686년(숙종 12)에 용원 서원(龍源書院)을 세워 제향해 왔다.
[건립 경위]
용원 서원은 1686년(숙종 12)에 향토 의병장이자 지방 유림인 문위(文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변창후(卞昌後)를 추가 배향하였다. 용원 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7년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로 이전하여 서원을 복원하였다. 1991년에는 용원 서원 사당인 모현사를 복원하였다.
[위치]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어인길 41[용산리 157]에 위치한다. 장기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지방도 1099호선을 따라 가다가 보면 송라교를 만난다. 여기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다가 용산교를 통과하여 조금 더 진행하면 마을 끝부분 도로변에 있는 용원 서원을 만난다.
[형태]
용원 서원은 대문채와 강당, 사당 그리고 아래채 4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와 강당, 사당을 축선상에 배치하고 강당의 우측으로 아래채를 두었다. 강당의 좌측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합각지붕이다. 평면은 좌측 2칸에 방을 들이고 우측 2칸은 대청으로 구성하였다.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 들문을 달아 폐쇄하였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며 상부 가구는 도리를 다섯 개 쓴 5량가이다. 사당인 모현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규모로 내부를 터서 통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겹처마, 박공지붕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며 상부 가구는 도리를 세 개 쓴 3량가이다.
[현황]
용원 서원은 서원의 형식에서 동재와 서재가 생략되었으나 대신 아래채와 신도비를 세워 배치상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용원 서원은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87년에 복건된 서원으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