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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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Invasion of Korea(in 1592~1598) |
이칭/별칭 | 임진전쟁,임진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2년 - 임진왜란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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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598년 - 임진왜란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부산진 - 부산광역시 동구 |
발생|시작 장소 | 신창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
발생|시작 장소 | 우현 - 경상남도 거창군|경상북도 김천시 |
발생|시작 장소 | 율원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
종결 장소 | 노량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성격 | 왜란 |
관련 인물/단체 | 조선|일본|명나라 |
[정의]
1592~1598년 2차에 걸쳐 일본이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를 비롯한 조선 전역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리다]를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1598년(선조 31)까지 7년간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치러졌다.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을 이루고 있던 조선 시대 거창현(居昌縣)과 안음현(安陰縣)·삼가현(三嘉縣) 일부 지역은 일본군이 북진하는 주요 진격로에 위치한 관계로 전란 동안의 피해가 극심했다. 전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지역의 백성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기도 했다.
[임진왜란 초기 거창 지역의 전황]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중로·좌로·우로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이 중 우로는 일본군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맡았다. 11,000여 명의 제3군은 4월 18일 김해에 상륙하였는데, 김해성 방어를 맡은 김해 부사(金海府使) 서예원(徐禮元)과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은 일본군이 성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도주해 버렸다. 또한 김해성을 구원할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도 진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최전선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일본군 제3군은 김해(金海)·영산(靈山)·창녕(昌寧)·현풍(玄風)·성주(星州)·지례(知禮)·김산(金山) 등 경상우도의 주요 고을을 빠른 속도로 점령하였으며, 추풍령·청주·경기도를 거쳐 황해도를 공략하였다.
거창 일대는 제3군의 진격로 인근에 있었기에 전란의 소식을 일찍 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란 초기 관군의 대응은 허술하였다. 삼가 현감(三嘉縣監) 장익(張翊)은 일찍이 도주하였고, 거창 현감(居昌縣監) 정삼섭(鄭三燮)은 전란이 일어나는 도중에도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행하고 있었다. 이에 거창 지역의 많은 백성들은 터전을 떠나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4월 23일 거창에서의 첫 전투가 신창(新倉)[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에서 치러졌다. 우방어사(右防禦使) 조경(趙儆)에게 종군한 정기룡(鄭起龍)의 기병이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선봉군 500명을 격파하였던 것이다.
[경상우도 의병의 중심지, 거창]
전란 초기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북진하였고, 5월 3일 도성인 한양이 함락되었다. 국왕이었던 선조(宣祖)는 의주(義州)까지 피난하였으며,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등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곧 조선 정부와 백성들은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자 반격을 가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후, 분조(分朝)를 이끌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을 독려하였다. 또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곡창 지대인 전라도 일대가 보존되었으며, 명나라까지 참전하여 불리했던 전세는 접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경상 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임명된 김성일(金誠一)은 전란 초기 주요 전장이었던 경상도로 내려가 어지러워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거창 지역에서도 유력한 재지 사족이 중심이 되어 많은 의병군이 일어났다. 이때 거창 출신의 재지 사족으로는 문위(文緯)가 처음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592년 5월 고령현(高靈縣) 출신의 김면(金沔)이 경상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조종도(趙宗道)·곽준(郭䞭)·문위 등과 함께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龍山)에 의병군의 진(陣)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거창 지역은 1593년 김면이 병사할 때까지 경상우도 의병 군단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김면의 휘하에는 경상우도의 많은 의병장들이 참여하였는데, 거창현과 안음현 출신의 인사들도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인사로는 기병 유사(起兵有司)를 맡은 정유명(鄭惟明)·성팽년(成彭年), 참모장 서기(參謀掌書記)를 맡은 문위·윤경남(尹景男)·유중룡(柳仲龍), 선봉장(先鋒將)을 맡은 변혼(卞渾), 복병장(伏兵將)을 맡은 김선(金瑄)·이형(李亨), 돌격장(突擊將)을 맡은 정용(鄭庸), 그 외에 군기 유사(軍器有司) 신수(愼守), 군량 유사(軍糧有司) 변희황(卞希璜), 전마 유사(戰馬有司) 양면(梁緬) 등이 있다.
조선군의 반격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란은 점점 접전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데,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라도를 사수한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일본군은 육로를 통한 전라도 진격을 시도하게 된다. 거창을 비롯한 경상우도 일대는 전라도로 향하는 통로였다. 따라서 전라도 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많은 전투가 경상우도 일대에서 펼쳐졌다. 그런 가운데 거창 출신의 의병장이 대거 참여한 김면의 의병군은 경상도 각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되는데, 대표적인 전투로는 1592년에 있었던 개산포(開山浦)[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전투, 무계(茂溪)[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전투, 지례 전투, 성주 전투, 사랑암(沙郞巖)[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일대로 추정] 전투, 개령(開寧) 전투 등이 있다.
이 무렵 거창 지역에서 치러진 대표적인 전투로는 우현(牛峴)[우척현(牛脊峴)] 전투가 있다. 우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과 경상북도 김천시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요로(要路) 중 하나였다. 1592년 6월 중순경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의 정예 병력 1,500여 명이 우현을 넘어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으로 진격하려 했는데, 때마침 김면 휘하의 복병장 이형이 우현을 지키고 있었다. 이형은 산척(山尺)[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일종의 사냥꾼] 수백 인을 이끌고 일본군을 상대로 매복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일본군은 의병군의 공격에 퇴각하였고, 이 전투에서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독려한 이형은 끝내 전사하였다. 우현 전투는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좌절시킨 전투 중 하나이며, 김면 의병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방어 전략을 고심하게 된다. 이에 김면은 우현에 의병군을 증강하였다. 또한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의병장 정인홍(鄭仁弘) 등이 거창에 직접 찾아와 김면 등과 회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칠 방도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6월 24일에는 김면이 여섯 고을의 의병을 모아 거창 영계(瀯溪)에서 결진(結陣)하는 등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방어선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명나라 군의 거창현 주둔]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 군이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였다. 아울러 이순신의 수군과 전열을 정비한 관군 및 의병의 활약 등으로 일본군은 경상도 남부로 퇴각하게 되고, 명나라와 강화 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때 일본군은 경상도 해안가에 병력을 분산하여 진을 친 뒤, 강화를 진행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조명 연합군(朝明聯合軍)과 대치하였다.
일본군이 남쪽으로 퇴각함에 따라 명나라 군대도 남하였는데, 1593년 5월 무렵 유정(劉挺)이 이끄는 명나라 군의 본진이 성주에 두어졌다. 또한 유정 휘하의 이녕(李寧)·조승훈(祖承訓)·갈봉하(葛逢夏) 등이 이끄는 명나라 병력 5,000여 명이 약 1년 간 거창현에 주둔하였다. 이때 거창 사람 변청(卞淸)이 사재를 털어 명나라 군대를 환대했다고 한다. 이 기간은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전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晉州城) 전투가 진행되었다. 약 1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진주성의 관군과 의병이 결사 항전하였으나,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거창 출신의 정용·오희남(吳希男)·장헌부(章獻富) 등도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이때 거창현에 주둔하고 있던 이녕과 조승훈은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나, 함양(咸陽)까지만 진격하고 돌아왔다.
[정유재란과 거창 지역의 전황]
일본과 명나라 간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선조 30)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재차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일본은 1592년과는 달리 전라도를 포함한 조선 남부 지역을 차근차근 장악해 나가는 계책을 세우게 된다. 조선 정부도 일본의 재침입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1596년 11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거창현·안음현·함양군에 청야(淸野) 작전을 하달하기도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이끄는 일본군 정예 병력 수만이 안음현에 위치한 황석산성(黃石山城)[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소재]을 공략하였다. 황석산성은 거창에서 육십령(六十嶺)[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사이에 있는 고개]을 넘어 전주(全州)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일본군 입장에서는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꼭 공략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이곳에는 전란 초기 김면 휘하에서 활동했던 곽준·조중도 등이 지키고 있었으며, 거창을 비롯한 인근 고을의 백성들도 방어를 위해 합세하고 있었다. 8월 13일경 일본군이 거창·합천(陜川) 등지에 출몰하였고, 15일 안음·함양을 침략한 후, 18일 대대적으로 황석산성을 공격하였다. 곽준·조종도 등을 비롯해 많은 백성들이 끝까지 싸웠으나, 끝내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황석산성 전투 승리 후 일본군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일대를 유린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1597년 9월 직산(稷山)[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일대] 전투에서 명나라 군에 패배하여 일본군의 북진은 일단 저지당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펼쳐진 명량 해전(鳴梁海戰)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참패를 당하여, 삼남(三南)을 공략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일본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일본군은 경상도 남부로 후퇴하여 남해안 일대에 왜성(倭城)을 쌓고 농성전에 돌입하였다.
왜성에 들어간 일본군은 수시로 경상도 남부의 내륙으로 들어와 분탕질을 저질렀는데, 거창 일대도 피해가 심한 지역 중 하나였다. 특히 사천(泗川)에 본진을 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 일본군의 분탕질이 극심하였다. 조명 연합군은 경상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거창 일대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의 일본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 무렵 거창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투로는 율원(栗院) 전투[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가 있다.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정기룡이 삼가현에, 명나라 부총관(副總兵) 해생(解生)이 합천군에 주둔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1598년 3월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의 군대가 율원에 주둔한 채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첩보를 듣게 되고, 정기룡과 해생의 조명 연합군이 곧바로 출전하여 율원의 일본군을 물리치게 된다.
율원 전투 이후에도 시마즈 요시히로 휘하의 일본군은 재차 거창 일대를 침입하였다. 1598년 4월, 시마즈 요시히로의 예하 부대가 거창을 침입하다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이광악(李光岳)에게 격퇴당하였다. 또한 정기룡·이령의 조명 연합군이 거창에서 회동한 뒤, 함양군의 사근(砂斤)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의의와 평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와 인근 고을은 임진왜란 동안 중요한 전장이었다. 전란 초기에는 일본군의 진격로에 인접해 있었으며, 전란 중에는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한 길목 역할을 했다. 또한 전란 막바지에는 경상도 남부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농성 중이었던 일본군과 조명 연합군이 대치하던 곳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거창 지역은 전란 막바지까지 참상을 겪어야만 했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에 거창현·안음현·삼가현의 많은 백성들이 피난을 갔으며, 농경지는 황폐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백성들은 임진왜란 중 일본군과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 지역의 많은 유림들이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과 함께 지역을 수호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름 없는 백성들이 인근에서 치러진 진주성 전투와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여 끝까지 싸우다 순국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보여 준 거창 지역 백성들의 활약은 일본군의 침략 의지를 좌절시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으며, 무엇보다 이들의 우국충정은 현재적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