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2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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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時良里-洞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시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언 |
중단 시기/일시 | 2010년 무렵 -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큰 제사를 올린 뒤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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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당목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시량리 390 |
성격 | 동제 |
의례 시기/일시 | 음력 1월 14일 |
신당/신체 | 당목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시량리 시릿골마을에서 음력 1월 14일 자정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냈던 마을 제사.
[개설]
청송군 진보면 시량2리 시릿골마을에서는 마을 북쪽 입구에 있는 언덕 위아래의 당목에서 동제를 지냈다. 신격(神格)은 할머니신 두 위(位)와 할아버지신 한 위이며, 세 위에 각각 제상(祭床)을 차려 제를 지냈다.
[연원 및 변천]
시릿골마을 동제의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으나, 마을의 형성 시기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량리의 형성 시기는 지명 유래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시량이란 지명은 과거 시랑(侍郞) 벼슬을 했던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시랑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관직으로, 고려 공민왕 재위 기간 중 1356~1372년 사이 잠시 부활했던 것을 제외하면 고려 충렬왕 시기인 1308년에 사라진 관직명이다.
[신당/신체의 형태]
시릿골마을의 제당은 마을의 북쪽 입구에 있는 언덕을 기준으로 위아래에 따로 떨어져 자란 소나무와 느티나무이다. 언덕 위의 당목은 소나무이며 흙벽돌로 된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위에 마른 솔가지가 뿌려져 있다. 소나무는 높이 6m, 둘레 0.8m이다. 마을의 동제는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언덕 아래의 느티나무도 당목으로서 신성시되기는 하나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다. 느티나무는 높이 6.5m, 둘레 1.5m이다.
[절차]
동제를 지냈던 과거에 시릿골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이 되기 나흘 전의 동회(洞會)에서 제관을 선정한다. 마을 내에서 평판이 좋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정하며, 인원수는 제관 한 명과 도가[동제 때 사용할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 내외를 합쳐 총 세 명이다. 제의(祭儀) 준비에 들어가면 당목과 제관 집에 금줄을 치고, 길에 황토를 뿌리며, 동제를 지내는 동안에는 마을이 조용하도록 개들을 한곳에 모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장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진보장을 이용하며, 제수(祭需) 장만을 위해 찬물로 목욕재계한 뒤 두루마리를 입은 채 바구니를 들고 걸어서 오고 갔다. 장을 볼 때 물건값을 흥정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금지되었다.
제물은 백편[백설기], 감주, 삼실과(三實果)[감·밤·대추], 동태, 명태, 가자미 혹은 방어와 같은 어물(魚物)을 준비한다. 밥은 쌀 한 되로 짓고 정확히 삼등분하여 세 동신(洞神)에게 나누어 올리고 있다. 제의는 정월대보름날 자정에 지내며, 마을의 모든 집의 소지(燒紙)를 올리는 방식으로 제를 지낸다. 동제에 사용한 떡과 촛불은 제장(祭場)에 그대로 놔두는데, 학생이 그것을 가져가면 공부를 잘하게 된다는 믿음이 있다. 제의 후에는 동회에서 음복과 윷놀이를 하며, 이후 지신밟기를 하였다. 음복할 때에는 날것으로 올렸던 어물을 익혀서 먹는다.
[현황]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동제를 지속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2010년 무렵에 ‘1000년 뒤에 보자’는 의미의 큰 제사를 올린 뒤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