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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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夢和 |
영어공식명칭 | Kim Monghwa |
이칭/별칭 | 양포(良浦),대양(大洋),김석손(金碩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청송 지역에 정착한 무신.
[개설]
김몽화(金夢和)[1567~1636]는 1602년(선조 35)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평양성(平壤城) 진중에서 순절하였다. 김몽화의 아들 송탄(松灘) 김한룡(金漢龍)[1602~1669]이 인조 대에 안덕면 고와리로 들어와 정착한 이래로 김몽화를 입향조(入鄕祖)로 하고, 그의 아버지인 김세적(金世勣)[1518~1572]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포(良浦), 호는 대양(大洋), 초명은 김석손(金碩孫). 김몽화는 일찍이 과거를 통해 고관을 다수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그의 선대(先代)는 안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몽화의 8대조 취죽당(翠竹堂) 김균(金稛)은 개국공신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7대조 김중성(金仲誠)은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역임했으며, 6대조 김인민(金仁民)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다. 5대조 김춘경(金春卿)은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역임하였고, 고조할아버지 김맹훈(金孟勳)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다. 증조할아버지 김순(金珣)은 부사(府事)를 역임하였으나, 할아버지 김주(金宙)와 아버지 김세적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노성민(盧聖敏)의 딸 교하노씨(交河盧氏)이며, 목사를 지낸 김기손(金麒孫)[1537-1594]과 김몽화를 낳았다. 김몽화의 부인은 김정철(金正喆)의 딸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지낸 송탄 김한룡과 증(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김한옥(金漢玉)[1604~1647]이다.
[활동 사항]
1602년(선조 35)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4년(인조 2)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평양성에서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묘소]
병자호란 당시 평양성 진중에서 순절하여 대동강변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김몽화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의 백석탄(白石灘)은 청송8경 중 제1경으로 유명한데, 백석탄 인근의 장군대(將軍臺)에는 김몽화의 갑옷과 투구가 묻혀 있다.
[상훈과 추모]
자헌대부(資憲大夫) 훈련원지사(訓鍊院知事)에 증직되었다. 1960년대 초반 후손들이 세거지인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마을 입구에 김몽화를 추모하기 위하여 추원정(追遠亭)과 비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