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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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초기국가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경상북도 청송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청송 지역의 고대는 초기국가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가 해당된다. 그러나 청송의 고대를 언급한 문헌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고, 고고학 연구 성과도 미진한 편이다. 더구나 초기국가시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위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삼국시대]
청송 지역이 신라에 편입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2세기 초엽부터 5세기 초엽까지 신라의 영향권에 있던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말갈(靺鞨)이 자주 침략해 왔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 청송을 비롯한 인근 지역이 신라의 북방 경계에 해당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청송 지역은 5세기 무렵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481년[신라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3,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69]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변을 침입하여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대]까지 진군했지만, 신라·백제·가야 연합군이 이들을 물리쳤다는 기사가 있다. 호명성은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에는 이름만 있고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의 청송으로 비정(比定)하는 견해도 있다.
호명성이 청송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을 통해 청송이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삼국시대 청송 지역의 지명으로 칠파화현(漆巴火縣)[지금의 청송군 진보면·파천면 일대], 조람현(助攬縣)[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및 영덕군 달산면 일대], 청기현(靑己縣)[지금의 청송군 청송읍·부남면 일대], 이화혜현(伊火兮縣)[지금의 청송군 안덕면·현동면·현서면 일대]이 등장하는데, 칠파화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구려에 의해 설치된 행정구역이었다. 즉, 삼국시대 청송은 신라의 북쪽 국경 지역에 해당되며, 고구려·말갈과 각축을 벌이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송 지역의 삼국시대 고분은 많지는 않지만 대체로 5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조성된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묘제(墓制)는 덧널무덤[木槨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방무덤[石室墓]이며, 발굴되는 토기는 신라 계열로 확인된다.
[남북국시대]
남북국시대 청송 지역의 역사는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개편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삼국통일이 된 후 신문왕(神文王)은 재위 기간[681~692] 동안 많은 제도와 문물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국을 9개의 주(州)로 나누고, 5개의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이른바 ‘9주 5소경’이라 불리는 지방제도가 실시되었다. 당시 청송 지역은 상주(尙州)와 명주(溟州)에 분할되어 예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은 757년(경덕왕 16) 또 한 번 크게 개편된다. 이때 전국 주현(州縣)의 명칭이 대대적으로 변경되었는데, 청송 지역에서는 기존의 칠파화현이 진보현(眞寶縣), 조람현이 진안현(眞安縣), 청기현이 적선현(積善縣), 이화혜현이 연무현(緣武縣)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당시 주현의 명칭 변경은 한자식으로의 아화(雅化)가 골자였다. 그리고 이때 진보현은 문소군(聞韶郡)[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일대], 진안현과 적선현은 야성군(野城郡)[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일대], 연무현은 곡성군(曲城郡)[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임동면·월곡면 일대]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되었다.
남북국시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왕실의 왕위 다툼은 심화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이에 지방에서 성주(城主), 장군(將軍), 촌주(村主)라 불리던 이들이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독자 세력화를 도모하였다. 바로 호족(豪族)의 등장이었다. 각 호족들은 상호 간에 경쟁 또는 이합집산(離合集散)하였고, 결국 후삼국(後三國)이 정립되었다.
청송 지역의 주요 호족은 왕건(王建)의 고려와 견훤(甄萱)의 후백제가 대립하는 기간 동안 고려에 귀부(歸附)하였는데, 당시 청송 지역의 호족이었던 선필(善弼)과 홍술(洪術)도 일찍이 왕건에 협조했던 인물이다. 선필은 진보현과 진안현에 세워졌던 재암성(載巖城)의 장군이었다. 선필은 왕건의 고려가 신라와 통교하는 데 일찍이 도움을 주었었다. 또한 930년(고려 태조 13) 고창전투(古昌戰鬪)[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에서 치러진 고려와 후백제 간의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자, 왕건의 고려에 완전히 귀부했던 인물이다. 홍술의 경우 진보현의 촌주 출신이었는데, 922년(고려 태조 5)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에 왕건은 홍술을 문소군으로 보내어 의성부성주장군(義城府城主將軍)으로 삼고, 후백제를 막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