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273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집필자 이수환

[정의]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역사.

[개설]

청송군에는 청동기 유적인 고인돌이 발견되었기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고구려의 영역이었으며, 이 시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신라 계열이다. 통일신라시대 칠파화현(七巴火縣)진보현(眞寶縣), 조람현(助攬顯)진안현(眞安縣), 청기현(靑己縣)적선현(積善縣), 이화혜현(伊火兮縣)연무현(緣武縣)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보성부(甫城府)안덕현(安德縣)으로 개편된 이래 10세기 중·후반 운봉현(雲鳳縣), 986년(성종 5)에는 청부현(靑鳧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선시대 청부현(靑鳧縣)송생현(松生縣)을 합쳐 청송군(靑松郡)이 되면서 이로부터 진보현(眞寶縣)과 함께 두 고을로 존치(存置)하며, 지방행정단위로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존치하였다.

도호부(都護府)였던 청송은 1895년 23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청송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道制)에 따라 경상북도 청송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전국 부·군의 통폐합에 따라 청송군의 행정구역은 진보군을 편입하여 8개 면 86개 리·동으로 개편되었다. 1979년에 청송면에서 청송읍으로 승격된 것, 1983년 영양군 입암면의 일부 지역이 진보면에 편입된 것 외에는 큰 변동없이 1읍 7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선사]

청송군의 선사시대 유적은 매우 적은 편이다. 석기시대와 철기시대 유적은 전혀 보고되지 않기 때문에 인근 지역의 유적을 통해 추정할 따름이다. 다만 동일 내륙권인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신상리,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등에서 지표·발굴 조사가 보고된 사례는 다수 확인이 된다. 그리고 선행 연구의 성과를 고려한다면 청송군 내 하천 변에 형성된 넓은 충적지와 낮은 구릉지대가 석기시대 사람들이 거주하기 좋은 자연조건을 가진 곳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이 지금과 같았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시대 유적들도 다수 확인되는 바, 청동기 유적으로는 고인돌이 2017년 현재 19곳이 보고되어 있다. 주로 하천 변의 곡간(谷間) 충적지와 구릉 말단부 지형 등에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 외 청동기시대 유물포함층이 확인되었고, 토기 파편과 석촉(石鏃)·석부(石斧)·어망추(漁網錘)·박편(剝片) 일부가 주왕산면 하의리진보면 진안리에서 수습되었다.

[고대]

청송 지역이 신라에 편입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구려와의 북방 경계 영역으로 추정이 된다. 5세기 『삼국사기(三國史記)』 481년[신라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3,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69] 고구려가 북변을 침입하여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호명성을 지금의 청송으로 비정(比定)하는 견해도 있는 만큼 고구려에 편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와 고구려 사이 지리적 이점을 두고 쟁탈을 벌였던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서 청송 지역의 지명으로 칠파화현, 조람현, 이화혜현이 등장하는데, 칠파화현을 제외하면 모두 고구려에 의해 설치된 행정구역이다.

한편 이 시기 조성된 삼국시대 고분은 지표조사를 통해 하천 유역에 분포한 18기가 보고되었다. 이 중 파천면 신흥리와 진보면 진안리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지역 내 고분의 성격이 다소 규명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신흥리 고분군에서는 삼국시대 돌덧널무덤[石槨墓] 6기와 돌방무덤[石室墓] 1기가 확인되었으며, 금동제 귀고리[耳飾], 굽다리접시[高杯], 곧은입항아리[直口壺]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진안리 고분군에서는 덧널무덤[木槨墓] 1기와 돌덧널무덤 3기가 조사되었으며, 유물은 금동제 귀고리, 굽다리접시, 단지[短頸壺], 인화문짧은굽다리접시[印花文臺附碗] 등이 수습되었다. 그 묘제와 유물은 신라계열이며, 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7세기까지 조성된 것이다.

통일신라 직후 신문왕 때 지방제도로 9주 5소경(九州五小京)을 설치한 후 당시 청송 지역은 상주(尙州)와 명주(溟州)에 분할 예속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757년(경덕왕 16) 전국 주(州)·현(縣)의 대대적인 명칭 변경 때 기존 칠파화현진보현, 조람현진안현, 청기현적선현, 이화혜현연무현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때 진보현은 문소군(聞韶郡), 진안현적선현은 야성군(野城郡), 연무현은 곡성군(曲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되었다.

남북국시대 정립 후 지방의 독자세력인 호족(豪族)이 등장하는데, 청송 지역을 대표한 호족은 선필(善弼)과 홍술(洪術)이다. 선필은 왕건(王建)이 신라와 통교하는 데 일찍이 도움을 주었고, 930년(고려 태조 13) 고창전투(古昌戰鬪)에서 고려가 승리하자, 왕건에 완전히 귀부(歸附)했던 인물이다. 홍술진보현의 촌주(村主) 출신으로 922년(고려 태조 5) 고려에 귀부했고, 왕건은 그를 문소군으로 파견해 의성부성주장군(義城府城主將軍)으로 삼고 후백제를 방어하게 하는 등 친고려적 입장을 견지한 지역이었다.

[고려]

고려시대 청송 지역은 여러 차례 행정구역과 고을 명칭의 변화가 있었다. 먼저 940년경(태조 23) 보성부안덕현으로 개편된 이래 10세기 중·후반 운봉현, 986년(성종 5)에는 청부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예주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안덕현은 안동시 영역이던 곡성군의 영현(領縣)으로 존재하다가 1390년(공양왕 2년) 독립 현으로 승격해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안덕현을 제외하고 청송 지역에 있던 고을은 고려시대 동안 예주의 임내(任內)로 있으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한편 문헌상 진보현에는 천숙(泉宿), 춘감(春甘), 파질(巴叱), 고을마(古乙亇), 성부부곡(省夫部曲)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지방 호족세력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토성분정(土姓分定)을 통한 본관제(本貫制)를 실시하였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고려시대 각 고을의 토성(土姓)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청송의 경우 청부현의 토성으로 심(沈), 김(金), 전(全), 장(蔣), 신(申)이 확인된다. 송생현의 토성으로 윤(尹), 노(盧), 전(全) 외에도 내성(來姓)인 전(全), 박(朴), 이(李) 및 촌성(村姓)인 정(鄭)이 있다. 안덕현의 토성으로 김(金), 이(李), 손(孫), 전(全), 장(蔣)이 확인된다. 진보현의 토성으로 조(趙), 이(李), 김(金), 박(朴), 백(白)과 속성(續姓)인 전(全), 춘감부곡(春甘部曲)과 파질부곡(巴叱部曲)의 부곡성(部曲姓)인 오(吳)가 있다.

983년(성종 2) 호족에 대한 이직(吏職)이 개편되면서 고을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층(鄕吏層)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예비 관료층으로 존재하며, 고려 후기부터 상경종사(上京從士)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했고, 향촌(鄕村) 내 위상도를 높여 갔다. 고려시대 이 지역 토성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심홍부(沈弘孚)진성이씨(眞城李氏) 이자수(李子脩) 등이 있다.

[조선]

조선시대 청부현송생현을 합쳐 청송군이 되면서 진보현과 함께 두 고을로 존치하며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유지되었다. 1394년(태조 3) 경상도의 군현(郡縣) 통폐합 과정에 진보현이 되는 보성부에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 군현이 되었고, 고려시대 독립 현인 안덕현이 병합되었다. 1416년(태종 16)에는 전국의 음(音)이 유사한 고을의 명칭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전라도 보성(寶城)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신라 경덕왕 때 처음 부여된 진보(眞寶)로 개명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진보현 속현 청부현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내향(內鄕)이라는 연유로 청부현진보현 두 고을의 명칭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관아가 군내 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옛 진보현 백성들이 불편한 점이 많다는 청원이 계속되자 송생현과 합쳐 청송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청송’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459년(세조 5)에는 세조의 모후인 소헌왕후 심씨를 기리기 위해 읍격을 도호부로 승격, 유지되었다. 1423년(세종 5) 현으로 독립한 진보현은 1474년(성종 5) 고을 사람이 현감을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폐현되어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에 합쳤다가 1478년(성종 9)에 복구되어 존속하였다.

한편 청송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토성을 주축으로 지지적 기반을 갖춘 세력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앞서 언급한 토성과 속성이 병존하고 있었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균분상속제(均分相續制) 등 사회제도에 따라 내성(來性)이 유입되었고, 유입된 내성은 부계 친족 가족제도와 맞물려 정착하는 단계에서 성씨의 구성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청송과 진보 토성을 비롯해 내성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김씨(安東金氏), 평산신씨(平山申氏) 등 다양한 성씨가 세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청송 지역의 국난 극복 활동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 창의(倡義), 항일의병 등이 대표적이다. 먼저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전국의 대부분이 왜군의 침탈에 시달렸던 데 비해, 청송과 진보는 지리적 위치상 침입 경로에서 벗어나 있어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청송 지역에서도 나라를 위해 창의한 인사들이 직접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우거나 또는 순절했고, 군량과 병기 보급에 공헌하였다. 청송 출신 임진왜란(壬辰倭亂) 인사로는 곽재우(郭再祐) 의진에 참여한 조형도(趙亨道), 남윤조(南胤曺), 권준(權晙), 신지남(申智男), 권소(權昭), 안윤옥(安潤屋), 권완(權腕), 김사형(金士亨), 권의립(權義立) 등이 있다. 또한 권응수(權應銖) 의진에 참여한 김몽린(金夢隣), 김몽구(金夢龜), 김몽기(金夢麒), 김성원(金聲遠), 김성달(金聲達), 김몽룡(金夢龍)이 활동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 외 독자적 의병 창의, 관군 지휘, 보급 등에 공을 세운 인사가 다수 확인이 된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 발발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되는 등 국난을 당하자 청송 지역에서도 창의하여 전투에 참전하거나 지역 내 은거하며 절의를 지킨 인사들이 생겨났다. 직접 전투에 참여한 자는 윤충우(尹忠祐), 권일륵(權日玏), 심예달(沈禮達), 황극일(黃克一) 등이며, 고응섭(高應涉), 신기(申機), 김몽추(金夢鰍), 박함(朴涵) 등은 은거하여 절의를 지킨 대표적인 인사들이다. 특히 경기도 광주에서 치러진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순절한 윤충우, 권일륵은 병자호란 후 봉훈랑(奉訓郞)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병조참의(兵曹參議)에 각각 증직되었다.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 탈취를 기도한 무신난이 일어난다. 이때 청송 지역에서도 충군(忠君) 창의하여 의진을 조직하여 출전하려는 상황에 난이 평정되자 파진(罷陣)했다. 이러한 사실을 유후조(柳厚祚)가 1874년(고종 11)에 간행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 군문좌목(軍門坐目)에 의거하면 청송의 의병은 대장(大將) 조덕승(趙德昇), 부장(副將) 권대형(權大衡)·이붕령(李鵬齡)을 중심으로 다수의 사림(士林)이 임무를 맡아 참여하였다. 진보의 경우에도 대장 이사구(李思九), 부장 권성천(權聖天), 창의공사원(倡義公事員) 신숙(申璹)을 중심으로 다수의 사림이 임무를 맡아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군문좌목에 언급된 인물들 외에도 여러 인사가 창의에 동참하였다.

[근현대]

개항기 의병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전개된 전기 의병과 1905년부터 1910년경까지 전개된 후기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송 지역에서도 활발한 의병활동이 펼쳐졌다. 전기 의병기인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靑松義陳)진보의진(眞寶義陳)은 퇴계학(退溪學)의 적통(嫡統)인 유치명(柳致明)의 정재학파(定齋學派)와 서인(西人)의 학풍을 계승한 인물들이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송의진에는 유치명을 비롯해 김도화(金道和), 김흥락(金興洛), 이돈우(李敦禹), 서효원(徐孝源) 문인들이며, 진보의진에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적 전통을 계승한 청송심씨 일문의 인사들이다.

청송의진은 부(府) 4면과 현(縣) 5면에 외방장(外防將)을 설치하여 면군체제(面軍體制)를 갖추었으며, 흥해출진소(興海出陣所)영덕출진소(盈德出陣所)를 설치하여 주변 의병진과 협조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 영덕전투(盈德戰鬪) 등 전과를 올렸으나, 7월 20일경 화전등전투(花田嶝戰鬪)에서 크게 패하고, 고종의 의병 해산조칙에 따라 청송 지역의 의병들은 1896년 8월 해산하였다.

그 후 청송의진 일부와 그 후손들 60여 명이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다수가 지도층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최세윤(崔世允)이 대장으로 취임 후 지역 분대로 편성되어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7월 최세윤이 잠복하면서 산남의진은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었다. 이에 청송 지역 의병들은 서종락(徐鍾洛)이 이끌던 청송 동부진(東部陣)남석구(南錫球)가 이끌던 청송 서부진(西部陣)으로 편성되어 여러 차례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청송 동부진은 1910년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高臥室)에서 마지막 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였다.

조선시대 도호부였던 청송은 1895년 23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안동부 청송군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道制)에 따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행정 개편이 단행되었다. 이어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일제는 전국 부·군의 통폐합에 따라 청송군에 진보군을 편입하여, 청송군을 8개 면 86개 리·동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먼저 행정은 경상북도 도장관(道長官) 관할에 청송군수가 담당했고, 각 면의 면장은 국가 행정기관으로서 면을 대표하고 면 사무를 담당하였다. 사법과 치안은 대구지방법원 청송출장소청송경찰서가 수행하였다.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은 앞서 개항기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으로 전개된 구국 운동을 선행 단계로 하고 있다. 청송 지역의 계몽 운동은 교육 분야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였다. 청송군수의 독려와 향교(鄕校)의 지원으로 1909년경 사립낙일학교(私立樂一學校)광덕사립학교(廣德私立學校) 등이 설립되어 신지식 보급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각 지역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할 것을 목표로 활동한 교남학회(嶠南學會)에는 지역 출신 강래원(姜來遠), 조정식(趙定植), 이회발(李晦發)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청송 출신으로 국내외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면, 먼저 만주 망명 인사로 진보면 월전리 출신 박영산(朴榮山)은 1919년 4월 조직된 한족회(韓族會)에 이어 군정부(軍政府)·정의부(正義府) 등에서 활동을 하였다. 현동면 개일리 출신 남우락(南佑洛)은 청송에서 일본 순사를 구타하고 지서(支署)를 파괴한 뒤 단신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1915년 음력 7월 15일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는 진보 출신 권영만(權寧萬)이 본부의 지휘장(指揮長)으로 활동하였다. 권영만은 1915년 12월 24일 동료 우재룡(禹在龍)과 함께 경주(慶州)에서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관금(官金) 8,700원을 탈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권영만은 만주로 망명 후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1922년 9월 징역 8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은 국내외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청송 지역에서도 진보면 진보장터, 현서면 화목장터 그리고 청송면[지금의 청송읍]에서 6회 정도 일어났다. 군중들이 질서를 지키며 평화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총격과 탄압으로 해산당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청송 지역의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문제였다. 그래서 대구에서 시작된 ‘대구십일사건(大邱十一事件)’이 청송 지역으로 확산되어 좌익 세력이 지서를 점거하는 일이 일어났다. 나아가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의 남한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좌익 세력은 주왕산(周王山)[720.6m]과 보현산(普賢山)[1,124m]을 근거지로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는데, 이러한 양상은 6.25전쟁 발발 때까지 지속되었다. 6.25전쟁에서 청송 지역은 낙동강 방어선과 동남부 전선의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청송 지역은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광복 무렵 인구가 5만여 명에서 1968년경 8만여 명으로 증가했으나, 계속 감소하여 2018년 1월 현재 2만 6000여 명에 머물고 있다. 한편 1979년 5월 1일 청송면에서 청송읍으로 승격되어 2018년 현재 1읍 7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983년 2월 15일 영양군 입암면 일부[흥구동, 방전동]가 진보면에 편입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 행정구역 경계 조정으로 주왕산면 상평1리가 부남면 감연1동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 조례 제1059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였으며, 1993년 12월 30일 군 조례 제1377호로 군청 소재지를 청송읍 군청로 51[월막리 330]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행정지명 현행화 부동면 -> 주왕산면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