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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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Colonial Period |
이칭/별칭 | 일제시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역사.
[행정구역 개편]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의 공포에 이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 관제(官制)가 실시되었다. 조선시대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였던 청송 지역은 1895년 23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안동부(安東府) 청송군(靑松郡)이 되었고, 1896년 13도제(道制)에 따라 경상북도 청송군이 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해 9월 30일 조선총독부 지방 관제를 공포하여 도의 하부 행정구역으로 부(府), 군(郡), 면(面)을 재확인하고, 면을 법정 행정구역으로 제도화하였다. 그 뒤 1914년 3월 1일 전국 부·군의 통폐합에 따라 경상북도는 1부[대구부] 22군 1도[울릉도]로 개편되었다. 이때 경상북도 청송군의 행정구역은 진보군을 편입하여 청송면[지금의 청송읍] 9동, 부동면[현 주왕산면] 10동, 부남면 9동, 현동면 7동, 현서면 16동, 안덕면 9동, 파천면 11동, 진보면 15동 등 8개 면 86개 동으로 개편되었다. 진보군이 청송군에 통합될 당시 진보군 6개 면에서 서면, 남면, 상리면, 하리면 등 4개 면은 청송군에 편입되고, 동면과 북면 2개 면은 영양군과 영덕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청송군 소재지는 청송면 월막동이었다.
행정 업무는 도에는 도장관(道長官), 부에는 부윤(府尹), 군에는 군수(郡守), 면에는 면장(面長)을 두어 관내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으나, 그 권한은 조선총독부의 내무부(內務部) 지방국(地方局)에 획일적으로 통합·예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청송군 행정은 경상북도 도장관의 지휘를 받아 청송군수가 담당하였고, 청송면 등 각 면의 면장은 국가 행정기관으로서 면을 대표하고 면 사무를 담당하였다. 1917년 6월 면제(面制)가 공포됨에 따라 면장은 교육 사무를 제외한 관내의 모든 행정 사무를 맡아 처리하였다. 1919년 8월 19일부터는 도장관을 도지사(道知事)로 개칭하고,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가 폐지되면서 도지사가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사법과 치안]
일제는 1910년 6월 24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경찰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 아래 독립 관청으로 경찰통감부(警察統監府)를 두었다. 각 도에는 경찰부(警察部)를 두고, 경찰부 경무부장은 헌병대장이 겸직하였다. 각 군에는 경무서(警務署)와 헌병분대를 두었다. 이것이 헌병경찰제의 시작이었다.
경상북도 청송군에는 1910년 10월 5일 대구경찰서 청송분견소(靑松分遣所)를 설치하였고, 1911년에는 8개 면에 면 단위 경찰관 주재소(駐在所)를 설치하여 헌병경찰 통치 말단기구의 역할을 하였다. 또 1914년 9월 1일 경상북도 경찰부 산하 청송경찰서가 설치되면서 경찰계, 병사계, 고등경찰계, 보안계, 위생계, 사법계, 경비계 등의 부서를 두고 청송 지역의 치안 행정을 담당하였다. 치안 행정이란 결국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1910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에 사법부(司法部)를 신설하여 전국의 사법 행정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1912년 종래의 대구공소원(大邱公訴院)을 대구복심원(大邱覆審院)으로, 대구지방재판소를 대구지방법원으로 개칭하였다. 대구복심원은 경상도·전라도와 충청남도 일부 군을 관할하게 하였고, 대구지방법원은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울진군·삼척군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재판소 지청을 설치하여 재판소 사무 일부를 취급하도록 하였다. 경상북도에는 김천지청 등 6개 지청과 울진출장소 등 17개 출장소를 두었는데, 청송 지역에는 청송출장소가 설치되어 사법 업무를 관장하였다.
[교육]
일제강점기 교육은 4차례에 걸친 조선교육령의 개정을 통해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 영속화시키려고 하였다. 1910년까지 대한제국 학부(學部)[학무부(學務部)]의 인가를 받았던 학교들도 일제의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으로 탄압을 받아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일제는 한국민에게는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보통학교 시설에 대한 정책으로 1910년대에는 6면 1교제, 1920년대에는 3면 1교제, 1930년대에는 1면 1교제, 1937년부터는 1면 2교제를 추진하였다. 보통학교 시설은 한국민의 교육 수준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식민 지배의 편의를 위해서였다는 성격은 부인할 수 없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서는 1907년 5월 『황성신문』을 통해 취지서가 발표된 청송면의 사립 낙일학교(樂一學校)와 1909년 설립되었던 진보면의 사립 광덕학교(廣德學校)가 1912년 4월 1일 청송공립보통학교(靑松公立普通學校)와 진보공립보통학교(眞寶公立普通學校)로 각각 문을 열게 되었다.
그 뒤 1920년대에 현동면의 화목공립보통학교[지금의 화목초등학교], 도평공민보통학교[지금의 도평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에는 부남면의 부남공립보통학교[지금의 부남초·구천중학교], 청송면의 부동공립보통학교[1992년 폐교], 안덕면의 안덕공립보통학교[지금의 안덕초등학교], 파천면의 파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파천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어 1940년대에는 현서면의 수락국민학교[1995년 폐교]와 월정국민학교[2002년 폐교], 부남면의 대전국민학교[2013년 폐교], 청송면의 송생국민학교[1991년 폐교], 부동면[현 주왕산면]의 내룡국민학교[1988년 폐교], 안덕면의 지소국민학교[1992년 폐교]와 현남국민학교[1997년 폐교], 진보면의 신촌국민학교[2000년 폐교] 등의 초등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교명은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보통학교가 소학교(小學校)로 개칭되었고, 1941년에는 소학교령(小學校令)이 국민학교령(國民學校令)으로 개정됨에 따라 국민학교(國民學校)로 개칭되었다.
[독립운동]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을 선행 단계로 하고 있다. 구국운동은 일제에게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청송 지역의 독립운동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전후해서 일어난 전기 의병 시기에는 심성지(沈誠之)의 청송의진(靑松義陣)과 허훈(許薰)의 진보의진(眞寶義陣)이 활동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로 일어난 중·후기 의병 시기에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일어난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서 청송 지역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계몽운동은 실력 양성을 통해 민족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였던 구국운동의 한 형태였다. 1904년 8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의 신교육운동에서 비롯되었으나, 을사조약 이후 본격화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언론 등 각 분야로 확대되었다. 청송 지역에서는 교육 분야가 상대적으로 활발하였다. 사립학교 설립 외에 강래원(姜來遠), 조정식(趙定植), 이회발(李晦發) 등이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청송 지역의 신교육 확산에도 기여하였다.
청송 지역의 3.1운동은 청송군 8개 면 중 진보면, 현서면, 청송면[지금의 청송읍] 등 3개 면에서 6회 정도 일어났다. 진보면에서는 3월 25일 권태원(權泰源)의 주도로 진안리 진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현서면의 경우는 3월 26일과 27일 구산리 화목장터에서 조현욱(趙炫郁), 신태휴(申泰烋), 조병국(趙柄國) 등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청송면의 경우도 3월 21일과 22일, 4월 6일 등 여러 차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하나 내용이 자세하지는 않다.
[농민운동]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과 1920년대의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추진하여 많은 농민들을 소작농이나 화전민 또는 이주민으로 몰고 갔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각성한 농민들은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안정을 위해 이른바 소작쟁의(小作爭議)를 벌였다. 소작쟁의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도시 지역의 노동운동과 함께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달성군, 안동군, 예천군, 영천군 등 농촌 각지에서 소작인회, 농민회, 소작인계, 농민대회 등을 조직하거나 개최하여 항거하였다. 1930년대에는 한국 농민의 46.5%가 소작농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청송군에서는 이러한 농민운동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청년운동과 여성운동]
1920년대에는 청년운동도 활발하였다. 경상북도에서도 각 지역에서 청년운동 단체들이 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청년층의 역량을 계발하는 동시에 그 지방의 폐습을 개량하거나 산업·경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청년회는 1920년대 초기에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었으나,1920년대 중반부터는 점차 사회주의적 이념을 띤 단체로 변질되어 갔다. 경상북도에서 조직된 청년운동 단체 수는 약 290개 정도였으며, 청송 지역에서는 청송청년회를 비롯하여 3개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청년운동은 교육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청소년들의 지식 계발을 중요한 목적으로 하였던 만큼 청년회는 각종 야학회와 강습소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교과목은 주로 조선어, 한문, 일본어, 산술 등이었으며, 신지식의 보급을 통해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교육 활동 이외에도 강연회, 토론회, 체육 활동, 연예·오락 활동 등을 통해 심신을 단련해 나갔다. 특히 안동, 대구, 금릉, 예천, 경주 지역 청년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청송청년회도 회보를 발행할 정도로 활발하였고, 청송 지역의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진상을 조사하고 대책을 강구해 나가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상북도에서 조직된 여성운동 단체 수도 약 20개가량 결성되었는데, 청송 지역에는 청송여자청년회 1개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여성운동 단체는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여성 계몽 및 여성 교육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12일 조직된 청송여자청년회도 야학을 운영하여 지역 여성 개발에 기여하였다. 청년회의 활동은 청년운동과 함께 민족운동의 성격을 함께 추구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는 식민 통치 시기였다. 일제는 행정구역 개편, 치안과 사법제도의 도입, 교육 정책 등을 통해 철저하게 식민 지배를 영속화하려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강점기는 독립운동 시기였다. 3.1운동이나 비밀결사 단체의 활동은 물론 교육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모든 단체나 운동의 이면에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북도 청송 지역은 첩첩 산중 오지여서 각종 단체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파되지는 못하였지만, 청년회 활동 등을 통하여 청송 지역 사람들의 결연한 의지를 나름대로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