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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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笠場場-萬歲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20일 - 입장 장터 만세 운동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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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입장 장터 만세 운동 종료 |
발생|시작 장소 | 입장 장터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
성격 | 항일 운동|시위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안시봉|강기형|민옥석 |
[정의]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속했던 천안군 입장면에서 발생한 독립 만세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의 식민 통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 통치였다. 이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은 지속적으로 각 지역에서 발생하였고, 1919년에는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천안 지역에서도 경성[서울]과 평양 등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3월 14일 목천읍에서 천안 지역 최초의 만세 운동이 발생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입장에서도 3월 20일 만세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경과]
입장 장터 만세 운동의 주도자는 안시봉(安時鳳)이다. 안시봉은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笠場面 良垈里)에 거주하였으며 직산 금광(稷山金鑛)의 광부로 일하고 있었다. 안시봉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자택에서 태극기를 만들며 거사 준비를 갖추어 왔다.
안시봉은 3월 20일 오전 10시 즈음에 광명 학교(光明學校)[기독교 계통의 사립 여자 학교]의 교사를 비롯하여 학생 10명, 직산 금광의 광부와 부근 주민 약 70명과 함께 입장면 양대리(良垈里) 시장에 나가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이어 국기를 가지고 온 민옥석(閔玉錫) 등과 합세하여 3㎞ 떨어진 입장 장터로 향하여 그곳에서 약 300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참가자들은 입장 장터 만세 운동에 대한 급보를 받고 출동한 천안 헌병대와 충돌을 벌이면서 남자 40명, 여자 10명이 체포되었다. 광명 학교의 교사였던 강기형(康琦衡)은 평소 식민지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양대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등 적극적으로 호응하다가 체포되어 1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체포되지 않은 약 700여 명의 군중들은 입장 장터에 진출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결과]
입장 장터 만세 운동이 일어난 8일 후인 3월 28일, 직산 금광 회사(稷山金鑛會社)의 광부 약 2백 명이 아침 7시 반경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저지하는 일제 헌병과 충돌하였다. 당시 직산 금광 회사의 고용인이었던 박창신(朴昌信)이 3월 25일 동료 안은(安銀)·한근수(韓根守) 등과 모의하고, 27일 박창신 집에서 태극기를 수십 장 만들어서 동지였던 백학서(白學西)를 참가시켜 거사일로 28일을 택하여 입장 시장으로 갈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28일 아침 6시 30분경 갱부(坑夫) 교체 시간에 갱부들에게 독립 만세 시위를 권유하여 그 자리에서 다같이 만세를 부르며 입장 시장으로 행하였다. 도중에 양대리 시장에서 경찰에 제지당하자 시위대는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과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앗으려고 하였으며,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격렬하게 경찰과 충돌했다. 일제는 발포하여 시위대 중 6명이 부상하고 그 중 2명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8명이 체포되어 박창신은 1년 6개월, 안은과 한근수는 각각 1년, 백학서는 10월의 형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