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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29
한자 日帝强占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정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 통치를 당한 1910~1945년의 충청남도 천안 지역의 역사.

[개설]

일본 제국주의 의하여 국권을 빼앗긴 1910년대는 군사 강점과 식민지 무단 통치 체제가 실시되었다. 우선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통치 기구로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을 두어 식민지 통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 총독은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및 군대 통수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총독부 직제는 정부보다 격을 낮추어 총독 밑에 정무총감을 두고 그 밑에 국(局)을 두어 중앙 행정 조직을 이루었다. 각 도에는 도장관을 두었다가 뒤에 도지사라 명칭을 바꾸었다. 중앙 부서에는 모두 일본인 관리를 등용하고 자문 기관 등의 명예직만 친일파를 기용했을 뿐이다. 도장관에는 친일파 몇 사람씩 등용하였으며, 군수는 많은 수를 한국인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일본의 재임명을 거부하고 향리로 돌아간 수령도 많이 있었다. 그 자리는 어김없이 친일인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천안 군수는 재임명을 거부하고 향리로 돌아갔으며, 직산 군수는 재임명을 받아 눌러 앉았다.

[행정 구역 개편]

일제는 1913년 12월 지방 제도 개편을 선포하고, 1914년 1월 1일부터 새 제도에 의하여 군을 통합하였다. 구한말에는 전국에 350여 개의 군현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210여 군으로 통합하였다. 군현의 규모가 작은 충청도는 2~3개 군현을 한 개 군으로 통합하였는데, 이때 목천군과 직산군천안군에 통합하였다. 목천현직산현은 1896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전국의 현을 폐지하고 일제히 군으로 승격하였다.

목천군과 직산군은 삼한 시대에 창군되어 930년(고려 태조 13)에 천안군을 분리 창군하여 3개의 군현 시대를 열었고, 천년이 지난 1914년 1월 1일에 다시 통합되어 하나의 천안군이 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군수들이 면직되고 친일파 군수들이 부임하였다.

[식민지 지배 정책]

1. 1910년대 무단 통치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9일 대한 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식민지로 강점하자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통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 총독은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및 군대 통수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조선 총독을 일본의 육군·해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한국을 일본 군부의 지배하에 두고, 군사 방식에 의한 무단 통치를 자행하였다.

또한 조선 총독부는 1910년 9월 10일 헌병 경찰 제도를 창설하였다. 헌병 경찰 제도는 헌병으로 일반 국민에 대한 경찰 행정을 담당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로 종래의 경찰 제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경찰 제도는 그대로 남아서 군사적으로 지휘 관리되는 위에 다시 일제의 헌병대가 일반 경찰 직무를 수행하도록 개편된 것이었다.

또한 헌병 경찰 제도에 의거하여 조선 총독부의 행정 관리에게도 제복을 착용시키고 착검(着劍)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학교 교원들에게까지 제복과 대검을 착용하게 하여 한국인을 무력과 폭력으로 탄압하였다.

2. 1920년대 문화 정치

1920년대 일제는 1919년의 3·1운동 후 한국 민족의 전 민족적 저항에 큰 타격을 받고 식민 정책에 변화를 보였다. 우선 ‘문화 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 정책을 통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 전선을 분열시키며, 가혹한 식민지 통치를 은폐하려 하였다. 그리고 경찰관의 수를 대폭 증가시키고 독립 사상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였다. 또한 식량 수탈 등 사회·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3. 1930년대 민족 말살 정책기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한국어를 말살시키는 것이 민족 말살의 모체라고 판단하고, 한국어 말살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들어오자 관청에서도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또한 1935년부터는 한국어를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기 계몽 운동을 금지하고, 1937년부터는 일상생활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심지어 철모르는 국민학교 학생들이 무의식중에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매질을 하고 벌칙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에 대하여 탄압을 가하였고, 1940년에는 모든 한국어 신문들, 1941년에는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간시켰다.

또한, 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일제는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녀의 학교 취학을 못하게 하고, 직장에서 채용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하였다. 한국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37년부터는 매일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경례를 강제하는 동방 요배(東方遙拜)를 강요하였으며, 황국 신민 서사(皇國臣民誓詞)를 날마다 맹세하도록 강제하였다.

[사회·경제 수탈 정책]

1. 1910년대 토지 수탈

일제는 한국의 토지 약탈과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1910~1918년간에 걸쳐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 토지 소유권을 재조사하고 토지 가격과 지형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신고주의의 약탈적 방법으로 임야 및 민간인 공유지, 미간지·개간지, 농경지 등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국토 면적의 약 62%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신고를 하지 않거나 신고에 필요한 증빙 서류를 갖추지 못한 한국 농민의 토지는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약탈당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의 결과로 한국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반봉건적 지주 소작 제도의 강화로 일반 농민과 소작농의 처지는 더욱 열악하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일본 공업의 발전을 위한 원료 공급지와 독점 상품 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하여 1910년 12월 29일 이른바 회사령을 제정·공포하였다. 따라서 한국인은 회사 설립 허가를 얻지 못하여 민족 산업은 심하게 탄압을 받았다. 또한 1915년 12월 24일에 조선 광업령을 제정·공포하여 전국의 광산은 완전히 일본 재벌이 독점하였으며, 금광과 은광도 대부분이 일본인의 소유가 되었다.

일제는 한국 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유구한 민족사를 알지 못하도록 하면서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그리고 1910년 조선 총독부에 고적 조사반을 만들어서 서울·개성·평양·부여·공주·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과 산성, 고적 등을 파괴하고 수많은 출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2. 1920년대 미곡 수탈

1920년대 일제는 식량 수탈 등 사회·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일본 공업화에 소요되는 식량 등을 한국에서 수탈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수립하여 집행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한국의 미곡 생산량이 1920년 1,270만석에서 1928년에는 1,730만석으로 36.2% 증가하였으나, 일본으로의 미곡 수탈량은 1920년 185만석에서 1928년에는 742만석으로 301.1%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 결과 미곡의 한국인 국내 소비량은 1920년 1,085만석에서 1928년에는 988만석으로 10%나 감소되어 한국인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로부터 잡곡을 수입하여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부문에서도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은 192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3. 1930~1940년대 경제 수탈의 강화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 이후부터는 대륙 침략 정책에 맞추어 한국을 병참 기지화한다면서 일본의 독점 자본을 동원하여 북한 일대에 군수 공장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광산 자원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미곡 수탈도 이 시기에 더욱 강화되어 1933년부터는 미곡 총생산량 중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수탈량의 비율이 50%를 초과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는 미곡 외에도 면화와 누에고치의 약탈이 격증되었고, 한국인에 대한 조세 수탈도 격증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조세 수탈만으로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 조달이 부족하자, 1939년부터 ‘총동원령’을 공포하여 물자를 약탈하는 공출제(供出制)를 시행하였다. 처음에는 양곡부터 시작하더니, 1940년대에는 모든 일반 물자에 확대하여 송진기름·아주까리기름, 심지어 놋그릇·숟가락까지 강탈했다. 한국인은 일제의 이러한 약탈 정책으로 광복의 날을 기약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인력이 부족하자 징용 제도·징병 제도·근로 보국대 제도·근로 동원 제도·여자 정신대 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의 인력을 강제로 수탈하였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전까지는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광산이나 토목 공사에 집단 동원하더니, 중일 전쟁 이후인 1939년에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청장년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노동력을 수탈하였다.

또한 1943년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의 전문·대학생들을 전쟁에 강제로 내몰고, 1944년에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 청년들을 전쟁에 강제 동원하였다. 그리고 중학생은 물론 국민학생까지 근로 보국이나 근로 동원이라는 명목으로 군사시설 공사에 강제 동원하였다. 또한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제정·공포하여, 12세부터 20세까지의 한국인 처녀 수십만 명을 강제로 징집하여 일본과 한국의 군수 공장에서 사역시키고, 중국과 남양 지방의 전선으로 끌고가 군대 위안부로 내모는 만행을 저질렀다.

[식민지 교육 정책]

일제는 1911년 8월 제1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 말살과 식민지 교육을 위한 조처를 자행하였다. 조선 교육령의 기본내용은 첫째, 한국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 제국에 충량(忠良)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 둘째, 일본어를 보급한다. 셋째, 한국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고, 필요하면 실업 기능 교육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한편, 한국어 시간을 줄이고 일본어 시간을 대폭 증가시켰다. 날조 과장된 일본 역사를 강제로 학습시켜 일본 숭배 사상을 주입시키고,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여 한국 민족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온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민족이며, 오늘날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적·필연적 귀결이라는 의식을 주입시켰다.

또한 자부심이 강하고 독립심과 단결성이 강한 한국 민족에 대하여 일제는 한국 민족의 민족성은 본래 사대성과 당파성이 강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교육하여 패배의식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민족 말살을 위한 식민지 노예 교육에 철저히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가차 없이 이를 탄압하고, 사립 학교는 폐쇄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만세 운동의 가장 튼 원인을 독립 욕구에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1922년 2월 제2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 말살의 식민지 교육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제2차 조선 교육령은 외형상 일본식 교육 제도의 채택으로 내선 공학을 내세운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조선 민족을 말살하고 철저한 일본 동화주의 교육의 본질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특히 1943년의 제4차 조선 교육령으로 일제는 군사 교육과 노무 교육을 주입시키고, 수업 연한을 단축하여 학생들을 전시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였다. 소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하고, 고등 교육 기관을 전시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1943년 10월 학병제가 실시되어 어린 학생들을 전장으로 동원하였다.

[항일 독립 운동]

1. 1910년대

일제는 1910년대의 식민지 무단 통치 체제를 만들고 한국인의 국권 회복 운동·독립운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1905년 이래 전국에서 봉기하여 1907~1908년에 절정을 이루며 전개되던 의병 전쟁에 대하여 이미 한말부터 일본군을 투입하여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세력은 축소되었지만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1910년 일제 강점 이후에도 1914년까지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의병 운동에 참가한 의병은 물론, 그 가족과 그들에게 식량·물자를 제공한 한국인까지 처참하게 학살하고, 가옥에 방화하는 등 잔혹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또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고 그 영향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1910년 8월 이후에 일제는 모든 애국 계몽 운동 단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일제는 한국인의 정치 집회는 물론 교양 강연회와 연설회도 금지시켰으며, 종교 집회까지도 반드시 사전에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한국인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하게 박탈당하였다. 그밖에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들을 색출하여 수많은 애국자들을 학살하고 투옥하였으며, 독립 사상을 가진 인사들이나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고문하고 투옥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로는 광복회의 지도자 유창순 등이 활약하였다.

그렇지만 일제가 무단 통치 체제로 탄압을 가해도 우리 민족은 불굴의 투지로 비밀 결사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에 발각되지 않은 다수의 소규모 비밀 결사들이 조직되어 민족 독립을 되찾기 위한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외에 망명한 애국자들과 유민들은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과 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리고 만주·노령 일대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근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무관 학교는 청년 학생들을 모집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였고, 무관 학교 졸업생은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적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2. 3·1 운동

1910년대 독립운동의 결정을 이룬 것은 바로 3·1 운동이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대한 전 민족적인 항거가 1919년 3·1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국내에서는 그 이전부터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리던 애국자들이 해외에서의 움직임에 큰 자극을 받고,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등이 민족 대연합 전선을 결성하였다. 이에 그들은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 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3·1 운동의 만세 시위는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3개월간 50명 이상의 만세 시위 집회수가 1,542회, 총 참가 인원수가 202만 3098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50명 이하의 집회와 참가자수, 농촌에서의 무수한 소규모 집회까지 포함하면 3·1 운동의 실제 참가자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전 민족적 대규모 독립 시위운동이었다.

천안 지역 3·1 운동은 목천 보통학교 만세 운동[3월 14일], 입장 장터 만세 운동[3월 20일], 입장면 만세 운동[3월 28일],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4월 1일], 천안면 만세 운동[3월 29일], 풍세면 만세 운동[3월 30일], 성환면 만세 운동[3월 31일] 등의 사례가 확인된다. 특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유관순 열사와 그 집안사람들이 참여한 대표적인 만세운동이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이화 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심을 키운 유관순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어 총독부 휴교령으로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에 내려와 같은 해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위로 열사의 부모를 포함 19명이 순국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유관순 열사는 공주 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경성 복심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열사는 체포 당시의 상처와 고문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3. 1920년대

1920년대는 독립운동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으로 국내의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그리고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군자금을 지원하고 독립 전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와 노령에서 민족의 독립 의지와 독립 역량을 독립군의 무장 투쟁으로 한 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여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 조선 독립군 등 30여 단체에 달하였다.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 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 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 진입 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독립군 무장 투쟁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혈전을 벌여 수천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부상하게 만든 청산리 대첩의 승전을 가져왔다.

국내에서는 순종 장례일인 1926년 6월 10일 대규모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제 군경에게 사전 발각되어 수많은 인사들이 전국적으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월 10일 서울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운동을 벌여 서울만은 3·1 운동 때와 같이 철시와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독립 운동과 사회주의 독립 운동 사이에 발생한 분열을 해결하기 위하여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하여 민족 협동 전선으로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였다. 신간회는 급속히 발전하여 전국에 140여개의 지회와 4만 명에 달하는 회원을 가진 민족 운동 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충돌하여 일제 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 학생만 검거하자 광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검거된 학생의 석방, 민족 차별의 철폐, 약소 민족의 해방,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며 광주 학생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어 학생 시위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천안 출신으로 큰 활약을 한 독립운동가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끈 이동녕, 군자금 조달의 명수 홍찬섭, 김좌진 장군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별 이범석, 독립군 참모장 이장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1869년 2월17일 태어났다. 대한 제국 시기에 민권 운동·자강 운동에 앞장섰다. 1907년 안창호, 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1919년 상해 임시 정부 초대 의장이 되는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4. 1930년대 이후

193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을 비롯한 온갖 탄압이 더욱 강화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발전되었다.

국내에서는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발전하여 민족어와 민족 문자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문학·예술 분야에서도 민족적 작품들이 나와서 국민들에게 애독되고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성 제국 대학 학생들의 반제 동맹(反帝同盟)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 투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1937년까지는 소작 쟁의와 노동 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국외에서는 일제가 1931년 만주 침략을 자행하여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를 장악하였음에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완강하게 전개하였다. 독립군 부대들은 1941년까지 중국군과 연합하여 만주에서 용감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의열 투쟁도 강화되어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폭탄 투척,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등 다수의 의열 투쟁이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0년대에 한때 침체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투탄 사건을 계기로 항일 전선을 정비하고, 임시 정부의 독립군으로 1940년 9월에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광복군과 미국군과의 합동 작전이 계획되어 미군 전략 정보처[OSS]의 특수 훈련이 실시되었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여 비밀 결사로서 건국 동맹이 조직되어 건국을 준비하였다. 건국 동맹은 임시 정부와 조선 독립 동맹과 비밀 연락을 시도하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1945년 8월에는 국내의 건국을 준비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이 1940년대에도 불굴의 투지로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 준비를 전개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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