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5001
영어음역 Dongcheon-dong Teojutdaegam, Dongsin Ibalgwaneul Chajaseo
영어의미역 Dongsin Barber Shop, the Senior Member of Dongcheon-dong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186-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민

[개설]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가면 30년 가까이 이발관을 경영하고 있는 강기석, 김순여 부부를 만날 수 있다. 부부를 만나기 위하여 찾아가는 길을 물었더니, "기업은행 건물이 보이면 우회전을 해요. 거기 풍림상가 1층이에요"라고 했다. 판교에서 용인방면으로 동원교를 건너 대왕판교로를 따라가다 보니 기업은행 건물이 바로 보여 수월하게 이발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걸 창피해서 뭐, 얘기할 것 하나 없어요!"라고 말하였지만, 지금까지 이발관을 운영해오면서 느낀 가장 큰 보람이 무엇이냐고 묻자 "부모에게 물려받은 거 하나 없이, 맨 주먹으로 이용 기술 하나 배워서 애들 가르치고 지금까지 먹고 산다는 거, 그것이 보람이에요"라며 소탈하게 웃는다.

[나는 철원의 여성 이발사]

강기석, 김순여 부부는 각자의 고향에서 이발 기술을 배웠다. 강기석씨는 18살 때 김포 마송의 평화이발관에서 일을 배우면서 이발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강기석씨의 스승은 아직도 마송에서 평화이발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김순여씨의 고향인 강원도 철원의 중앙이발관에는 연자라는 여성 이발사가 있었다. 마침 친척 아저씨로부터 여성 이발사가 되기를 조언 받은 그녀는 17살 때부터 중앙이발관에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 끝에 김포에서 철원으로 온 강기석씨를 만나게 되고, 19살 때 철원을 떠나 성남에 자리를 잡았다. 김순여씨가 20살 되던 해, 부부는 아들을 낳고 결혼하여 지금까지 동천동에서 동신이발관을 운영하고 있다.

[동신이발관, 1979년 간판 그대로]

성남으로 이주한 부부는 협동이발관의 종업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동신이발관은 부부가 종업원으로 근무하던 이발관을 그대로 인수한 것이다. 1979년에 이발관을 그대로 인수하였는데, 당시 단골고객이던 신도섬유(현 연풍아파트 자리) 사장이 가게 이름을 동녘 동(東), 새로울 신(新)자를 써서 동신이발관이라고 지어주었다고 한다.

부부는 1970년대를 이발관 경기가 최고로 좋았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이발관에서 머리를 만졌다. 동신이발관의 주요 고객은 여중고생, 인근 공장의 남녀 직원들, 마을 주민들이었고, 심지어 미금이나 풍덕천에서까지 손님이 찾아왔다.

당시 이발비는 500원이 기본이었고, 65세 이상은 250원으로 저렴한 편이었다.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지금은 돌아가신 동막골 윤씨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단골이었던 할아버지에게 한번은 실수로 이발비를 300원 받았더니 50원을 더 받았다고 따지고 경로당에 소문을 내서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그때 그 시절이 좋았어]

1980년대는 이발소가 퇴폐업소로 몰리면서, 미용실이 활성화된 시기였다. 더구나 1990년대는 마을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손님이 줄어들어 이발소 영업이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1990년대 초 마을에는 건설 공사가 많아 이발관의 손님은 주로 아파트 공사 현장의 인부들이었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몽골 등 각지에서 몰려온 노동자들이 머리를 하러 동신이발관을 찾아왔다.

김순여씨는 국제적 이발관이었던 1990년대 이발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파키스탄 손님이 이발관을 찾았다. 면도하려고 수건을 목에 둘러주었더니, 수건때문에 목이 답답하다는 표현을 하려다가 "죽었어!"라고 말해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또 필리핀 단골손님이 이발관에 친구를 데려온 적이 있는데, 외국인인줄 알고 "필리핀에서 오셨어요?"했더니, 한국 사람이어서 민망했었다고 한다.

[아주머니의 눈물]

강기석, 김순여 부부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딸은 결혼해서 호주로 이민을 갔고, 아들은 결혼하여 이발관 근처에 살고 있다. "자식들 좋은 거 하나 없이 살았어. 어린 자식들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한명이 손을 놓으면, 혼자서 이발관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데, 그러기 힘드니깐, 돈은 벌어야 하고, 일하느라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 소풍가는 데, 운동회하는 데, 쫒아 다니지도 못하고, 내가 미안하지..." 이발 일을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1970~1980년대를 회상하던 김순여씨는 어린 자식들을 키우던 힘든 시절이 떠올랐는지 그만 눈물을 보였다.

2007년에는 강기석씨가 팔을 다쳐, 김순여씨 혼자 이발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보조 직원을 쓸까도 했지만, 인건비가 부담스러워 혼자 면도에서 이발, 청소까지 도맡아 하며 두 사람 몫을 해냈다. 아내의 지난 세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강기석씨는 "큰돈은 못 벌지만, 둘이 함께하면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살며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둘이 함께]

자식들을 다 출가시키고 나니, 이발소 일은 부부의 용돈벌이 소일거리이자 재미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영업을 하고, 매주 화요일은 정기휴무이다. 운이 좋으면 하루 10명 정도 손님을 맞는데, 겨울은 연료비가 비싸 어둑어둑 해지면 문을 닫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부부는 단골손님 여럿을 맞이했다. 10년 넘게 동신이발관을 다닌다는 한 아저씨는 서비스가 좋고 값이 저렴하여 여태껏 이곳을 찾는다고 하였다.

부부에게는 요즘 고민이 생겼다. 가까운 곳에 이발소나 미용실이 개업을 하면, 새로운 것에 대한 선호 때문인지 손님들이 확 줄어든다고 한다. 1년 전 이발관 바로 옆 자리에 들어선 미용실은 이발관 운영에 회의를 들게 했다. 머리 손질을 하러 찾아온 손님들은 밖에서 이발관과 미용실을 차례로 기웃거리고 주로 미용실로 발걸음을 옮긴다고 한다. 창문 너머로 손님이 얼마나 있는지, 내부는 어떻게 생겼는지 쳐다보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는 손님들 때문에 강기석씨는 가슴 미어진다고 씁쓸해한다.

[건강하면 됐지 뭘 더 바래]

이사 한번 없이 3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고 하였더니, "언제까지 할지는 몰라. 여긴 이제 뒷골목 동네인데 뭘..."라고 답한다.

1970년대 부부의 기억 속 동천동은 아카시아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작은 마을이었다. 섬유공장이 4개 정도 있었고, 인구는 20~30가구 정도인 아담하지만 번성했던 곳이었다. 부부는 이발관 앞의 오래된 도로를 가리키며, 이 길이 옛날에는 버스가 다니는 마을의 번화가였다고 했다.

오늘의 동천동에 대해 부부는 ‘주저앉는 도시’라고 말했다. "공기도 나빠지고 도로확장도 안되고, 이제 여기 이발소 앞은 일방통행 도로로 바뀌었어. 그래서 마을버스도 저기~ 뒷길로 돌아오지, 이리로는 들어오지 않아."라고 했다.

마침 머리 염색을 하러 왔던 단골손님은 자신이 고기리 토박이라고 밝히며, 수십 년 동안 한 동네에 살던 토박이들은 다 떠나고 이제 마을엔 외지인뿐이라고 하셨다. 그는 "용인시에서 동천동 여기 앞 길 도로 포장해서 깨끗하게 해준다고 하드만, 몇 년째 소식이 없어."라고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토박이가 살기 어려운 곳이 되어 버린 마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건강하면 됐지 뭘 더 바라냐며, 오고가는 손님들을 맞는 김순여씨, 손님 머리의 염색약이 피부에 묻을까 로션을 발라 꼼꼼하게 닦아주는 강기석씨. 부부 이발관을 뒤로 하고 나오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30년이 넘는 이발관 운영이 자랑스럽지 않다며 쑥스럽게 손을 내저었지만, ‘내 몸이 허락할 때까지 이발관 운영을 계속 하고 싶다’는 부부의 소망에 장인 정신이 묻어났다. 토박이들 대부분이 떠나고 주민을 위한 도로 보수도 더디기만 한 마을이지만, 동신이발관이 있는 한 마을의 번성했던 과거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 인터뷰(강기석, 남, 60세, 2008.10.16.)
  • 인터뷰(김순여, 여, 54세, 2008.10.16.)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