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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210
한자 李定烈
영어음역 Lee Jeongyeol
이칭/별칭 만위,춘호,한정,법명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성별
생년 1900년연표보기
몰년 1962년연표보기
본관 덕수

[정의]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방(芳)·윤봉조(尹鳳朝), 자는 만위(晩瑋), 호는 춘호(春湖)·한정(漢汀)·법명(法明). 아버지는 이종백(李種百)의 아들로 이현(李賢)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이정열은 천석꾼의 부자로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강태동(姜泰東)·최석천(崔錫天)을 만나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의 자신의 토지 200석을 팔아 전달하였다.

이어 1921년 5월 자신의 토지 270석을 다시 매각하여 대금 전액을 휴대하고 그 해 6월 임경호(林京鎬) 등과 같이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이회영(李會榮)에게 헌납하였다. 이 곳에서 약 1년간 머무르며 조성환(曺成煥)·김좌진(金佐鎭)·이세영(李世永)·김원봉(金元鳳)·유석현(劉錫鉉)·유근(柳瑾) 등 10여 명의 독립지사와 독립운동의 방략을 협의하였다.

1922년 4월 자금 조달차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뒤 다시 토지 150석을 매각, 강태동을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헌납하고, 1924년 가을 230석을 매각하여 대금을 휴대하고 민효식(閔孝植) 등과 같이 상하이[上海]에 가서 이시영(李始榮)에게 헌납하고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익희(申翼熙) 등과 접촉하며 군자금 문제를 협의하였다.

1929년에도 잔여 사유재산을 전부 매각하여 이시영에게 헌납하였으며, 1932~45년까지 이시영의 지령 아래 자금 조달을 위하여 국내에 위장 입국한 뒤 평안북도 구성·삭주 등지에서 광산을 경영하였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매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헌납하고 광산은 독립운동가의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45년 2월 김구의 지령에 따라 국내 밀파 행동대원 60명의 군량 조달의 사명을 받고 이를 주선하였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여의치 못하였다. 해방 이후 이시영이 부통령이 되자 관직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이시영은 후일 자손들에게 재산의 소비처를 밝히는 인증서를 만들어주었다 한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0 행정지명 현행화 모현면에서 모현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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