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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003
한자 趙重晦
영어음역 Jo Junghoe
이칭/별칭 익장,충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장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711년연표보기
몰년 1782년연표보기
본관 함안
대표관직 이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개설]

조중회영조·정조 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선조인 생육신 조려(趙旅)의 기상을 이어받아 죽음을 불사하고 간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영조의 빈번한 사묘(私廟) 참례,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죽게 한 처분 등에 대해 통렬히 논박하였다. 1781년부터 이듬해 죽을 때까지 경기도 용인 지역 충렬서원의 제32대 원장을 지냈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익장(益章). 생육신의 한 사람인 참판 조려의 10대손이며, 대사간 조영복(趙榮福)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6년 설서(說書)가 되고, 이어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1743년에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영조의 잦은 사묘 참례와 사행(使行)의 폐단을 간하다가 관직이 삭탈되었다. 1748년(영조 24) 대신들이 경연에서 상주하여 부수찬(副修撰)으로 복직되었으며, 부교리(副郊理),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1749년 탕평책을 반대하는 윤급(尹汲)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751년 다시 기용되어 사은겸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부수찬겸필선(副修撰兼弼善)을 지냈다. 1753년 승지, 1757년 대사간이 되었다. 1759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며, 이어서 승지(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 영변부사(寧邊府使),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지냈다.

1762년(영조 38) 승지로서 왕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때 극간하다가 유배되었다. 1770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으며, 이듬해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775년 정조 즉위 후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함경도에 혹심한 흉년이 들자 진휼책(賑恤策)이 시급함을 건의하였다.

1779년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81년 홍국영이 죽은 뒤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묘소]

묘소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83년(정조 7)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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