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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500
한자 恭安公丁玉亨-忠靖公丁應斗神道碑
영어음역 Gongangong Jeong Okhyeong Chungjeonggong Jeong Eungdu Sindobi
영어의미역 Tomb Stones of Jeong Okhyeong and Jeong Eungdu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 산 37-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상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6년 12월 24일연표보기 - 공안공정옥형·충정공정응두신도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공안공정옥형·충정공정응두신도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성격 신도비
건립시기/일시 1584년[정옥형신도비]연표보기|1728년[정응두신도비]연표보기
재질 화강암
높이 정옥형신도비: 높이 313㎝, 너비 83㎝, 두께 21㎝|정응두신도비: 높이 321㎝, 너비 94㎝, 두께 42㎝
소재지 주소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산 37-1 지도보기 지도보기
문화재 지정 번호 경기도 문화재자료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정옥형과 아들 정응두의 신도비.

[개설]

정옥형은 1513년(중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검열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다. 대사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 데 힘썼으며, 당시 김안로의 권세가 높아지자 조정을 떠나 외지를 돌며 민심을 두루 살피기도 하였다.

1544년(중종 39)에는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 문제를 맡아보았으며, 명종이 즉위한 후에는 소윤파에 가담하여 대윤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3등 공신이 되었다. 좌찬성에까지 오른 후 생을 마감했으며, 그 후 ‘공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응두는 1521년(중종 16)에 진사가 되었고, 1534년(중종 29)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선공감직장이 되었다. 그 후 이조좌랑, 좌부승지, 병조판서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66년(명종 21)에는 판중추부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죽은 후에는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각각 1584년(선조 17), 1728년(영조 4)에 세운 것이다. 1996년 12월 24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제일리 황새말에서 총신대학교 대학원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 안에 위치한다. 본래 고양군 지도읍 행신리에 있었으나 택지 개발로 인해 1988년 10월에 이곳으로 옮겼다.

[형태]

공안공정옥형신도비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으로 옥개석의 지붕 위쪽에서 처마 안쪽까지 기왓골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다. 전액(篆額)은 “공안공신도비명(恭安公神道碑銘)”이라 하였다. 비문은 홍섬이 짓고 한호가 썼으며 남응운이 두전(頭篆)을 했다. 총 높이 약 313㎝, 비신 높이 222㎝, 너비 83㎝, 두께 21.5㎝이다.

충정공정응두신도비 역시 방부개석 양식이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썼으며 최석정이 두전을 했다. 총 높이 약 321㎝, 비신 높이 234㎝, 너비 94㎝, 두께 42㎝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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