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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645
한자 完庄里-
영어음역 Wanjang-ri Juldarigi
영어의미역 Tug-of-War in Wanjang-ri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놀이/놀이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집필자 김호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놀이
노는시기 정월 대보름
관련의례/행사 대보름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줄다리기.

[개설]

완장리 줄다리기는 줄을 당기고 난 후 줄을 느티나무가 있는 개천둑에 두었는데, 그렇게 해야만 장마가 져도 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줄다리기와 관련한 금기로, 정월 대보름 전에 마을에 상이 나면 줄다리기는 다음 달로 미루어서 행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전승이 중단되었다.

[연원]

완장리 줄다리기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줄을 다렸으나, 태평양전쟁 때는 짚이 없어서 못했고, 해방이 되던 해에는 가을에 줄다리기를 했다. 또 한국전쟁 이후에는 사람이 줄어서 하지 못했다. 줄다리기가 크게 성행하던 1900년대 초에는, 인접한 네 개 마을에 두래패를 청병하자 인근 10여 개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암수 각 70m 정도의 거대한 줄을 완장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당기는데, 줄이 워낙 크고 많은 인원이 매달려 두 시간 정도를 꼼짝도 하지 않다가 결국 장목이 부러졌다. 또 청원한 두레패를 대접하느라 동회의 집집마다 먹을 것이 바닥났다고 한다.

[놀이도구 및 장소]

줄다리기를 하기 위해서는 정월 대보름 삼 일 전부터 줄을 만들었다. 줄은 동네에서 나온 짚으로만 만들었다. 왼새끼로 새끼를 꼬고 나무 기둥처럼 세우면 남자 세 명이 새끼 세 가닥을 돌려서 동아줄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아줄을 포개서 묶는다. 줄을 다 꼬아서 묶으면 그 둘레가 약 2m 정도로 성인 남자의 한 아름이 넘었다.

일반적으로 많은 인원이 달라붙는 암줄이 더 굵고 더 길기 때문에 숫줄보다 무거웠다. 어린이와 장가 안 간 사람도 아이라고 생각하여 여자 편에 들었기 때문에 암줄에 사람이 더 많았다. 줄을 매는 작업은 마을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길과 느티나무 사이의 밭에서 진행되었으며, 줄다리기는 마을의 큰 길에서 행해졌다.

[놀이방법]

정월 대보름날 해가 질 무렵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줄을 매던 밭 옆의 큰 길로 모여들었다. 남자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줄을 메고 마을을 도는데, 두레 노는 사람들이 앞장을 서고 뒤에서 “으쌰! 으쌰!” 하면서 돌았다. 이때 암줄은 마을의 아래를 돌고 숫줄은 마을의 위를 돌았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물이 많이 있는 지역은 암줄이 돌고, 높은 지대라서 물이 없는 지역은 숫줄이 도는 것이다.

줄을 메고 마을을 다 돌면 큰 길에 줄을 놓는데, 암줄은 아래쪽에, 숫줄은 위쪽에 두었다. 암줄과 숫줄 모두 남자들이 메고 일어선 뒤에는 암줄·수줄이 서로 닿을 듯하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이를 “을른다”고 하였다. 몇 번을 으르고 장난치다 두 줄이 붙으면 숫줄이 암줄 구멍(고)에 끼워진다. 숫줄은 구멍이 작고, 암줄은 구멍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암줄에 숫줄이 끼워지면 동네 어른이 멍에목으로 빗장을 질렀다.

암줄·수줄이 연결되면 줄을 땅에 내려놓고 남녀가 양쪽으로 갈라섰다. 남자는 위쪽, 여자는 아래쪽에 서는데, 두레 노는 사람들이 징을 세 번 때리면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줄이 너무 굵어서 줄 아래에 손으로 잡도록 동아줄을 꼬아 놓았다. 줄다리기는 세 번을 했다. 첫 번째에 여자가 지려고 하면 남자들이 도와주었다. 암줄이 질 듯하면 짓궂은 부인네가 와서 숫줄을 당기는 남자들을 떼어 놓아 줄을 못 쥐게 한다. 처음에는 남자가 져주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남자들이 이겼다. 그래야 풍년이 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은 길 옆에 비켜 놓는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완장리에서는 다른 곳과 달리 줄다리기가 끝난 후 두레를 놀았다. 두레도가집부터 시작하여 마을을 도는데, 정초에 쇠를 울려 주면 집안이 좋다고 하여 집집마다 우물→장독→부엌→마당의 순서로 놀아주었다. 두레패를 대접하는 음식은 각자 집에서 형편이 되는 대로 떡·밥·술 등을 차려내었다.

[현황]

완장리 줄다리기는 한 번 할 때마다 2백여 명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정 인원을 채우기 위해 외부 사람이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았으나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줄어들어 제대로 된 줄다리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이동읍 천리에서는 줄다리기를 하는 삼 일 동안 외지와는 통행도 금하고 부정을 탄다 하여 잡인의 출입도 금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6 행정지명 현행화 이동면에서 이동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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