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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섬·윤계 정려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1870
한자 尹暹-尹啓旌閭門
영어음역 Yun Seom Yun Gye Jeongnyeomun
영어의미역 Monument Gate of Yun Seom and Yun Gy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청덕리 346-4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양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문
양식 민도리 한식골기와 팔작지붕
건립시기/일시 조선 말기
정면칸수 2칸
측면칸수 2칸
소재지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청덕리 346-4 지도보기
소유자 윤경호

[정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청덕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신 윤섬과 그 손자 윤계의 정려문.

[개설]

윤섬의 본관은 남원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다. 1583년(선조 16)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거쳤으며, 1587년(선조 20)에 조선 왕실의 세계(世系)가 명나라에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은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공을 세워 수기광국공신(修紀光國功臣)으로 녹훈되었다.

그의 충신 정려는 임진왜란 때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상주 싸움에서 전사한 것을 기려 내려진 것이다. 1645년(인조 23)에 충신 정려문이 내려졌다. 이때에 윤섬용양부원군(龍陽府院君)으로 봉해지고 문열공(文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윤계윤섬의 손자로 자는 신백(信伯)이고, 호는 신곡(薪谷)이다. 1624년(인조 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인조 때에 청나라에 대해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소를 올렸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양부사로 있으면서 남한산성에 포위된 왕을 구하고자 노력하다가 순절하였다. 1645년에 충신으로 정려되고 충간공(忠簡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변천]

정려문이 현액되었던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고, 현재 후손인 윤경호가 관리하는 사당의 전면 문인방 위에 걸려 있다. 현존 건축물은 구성 양식과 치목의 수법으로 볼 때 근세에 들어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형태]

정려문이 현액된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목골적벽돌 한식기와 팔작지붕이다. 정면 2칸은 좌우방의 크기가 다르게 되어 있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조부인 윤섬의 신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이 방이 윤계의 신위를 모신 방보다 조금 크다.

[현황]

현재 정려문이 걸려 있는 사당 내부에는 윤섬, 윤계, 윤형갑의 위패와 후손 윤경호의 선대 4위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정려문 편액은 사당의 정면 두 짝 여닫이문이 설치된 문인방 위에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정려각에 현액되는 것과 달리 정려문이 후손의 가묘 전면 문인방에 현액된 특이한 경우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10.22 개설 내용수정 2012년 증보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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