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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116
한자 人文地理
영어음역 Inmunjiri
영어의미역 Human Geography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운식

[정의]

경기도 용인시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지리적 요소.

[개설]

용인은 경기도의 남부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로, 극동은 백암면 고안리, 극서는 수지구 고기동, 극남은 남사면 원암리, 극북은 수지구 고기동이다. 용인은 서울에서 동남 쪽으로 30㎞ 떨어진 도시로 행정구역상 동쪽은 이천시와, 서쪽은 수원·의왕·화성시와 접하고 남쪽은 안성시, 북쪽은 성남 및 광주시와 접하고 있다.

용인시의 면적은 591.5㎢이며, 행정구역은 3구(처인구·기흥구·수지구) 3읍(포곡읍·모현읍·이동읍) 4면(남사면·백암면·양지면·원삼면) 24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인구가 467.7㎢(전체 면적의 79.1%)를 차지하고, 처인구의 행정구역은 포곡읍·모현읍·이동읍의 3개 읍과 남사면·백암면·양지면·원삼면의 4개 면, 중앙동·역삼동·유림동·동부동 등 4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흥구는 81.7㎢(전체 면적의 13.8%)로, 보정동·마북동·구성동·구갈동·동백동·상갈동·서농동·기흥동·상하동·신갈동·영덕동 등 11개 동이 있으며, 수지구는 42.1㎢(전체 면적의 7.1%)에 신봉동·죽전1동·죽전2동·동천동·상현1동·상현2동·성복동·풍덕천1동·풍덕천2동 등 9개 동이 있다.

용인의 인구는 2010년 8월말 현재 87만 4104명으로 처인구에 21만 3564명(전체 인구의 24.3%)이, 수지구에는 30만 5058명(전체 인구의 34.3%)이, 기흥구에 34만 5353명(전체 인구의 39.4%)이 분포한다. 시청은 처인구 중부대로 1199[삼가동 556]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용인시는 백제 온조왕 이래 광주에 속하였는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점령한 후 용인을 구성현(駒城縣)으로 명명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 경덕왕은 757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용인을 한주(漢州)[9주의 하나]에 귀속시키고 구성은 거서(巨黍)로 개칭하였다.

신라가 망한 후 고려 태조는 940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여 광주대도독부에 용인을 귀속시키고 용구현(龍驅縣)이라 칭하였다. 1018년 현종은 광주목에 용인을 귀속시켰으나, 명종은 1172년 용인을 광주에서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현감(縣監)을 보직하였다.

처인현은 수원부에 귀속되어오던 것을 태조가 1397년 현령(縣令)으로 보직하였다. 양지현수주(水州)의 부곡(部曲)이던 것을 정종 때인 1399년 양지현으로 승격시켰고, 태종은 1413년 용구현처인현을 합쳐 용인현이라 개칭하고 16개 면을 귀속시켰다.

고종 때인 1895년 지방행정이 개편되어 용인현용인군으로 개칭되었고, 다음해에 양지군으로 개칭하였다가, 1914년 용인군이 되었다. 군 중심지를 구성면에서 수여면으로 이전하고 12개 면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1937년 수여면을 용인면으로, 읍삼면을 구성면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 고삼면을 안성군으로 귀속시키고, 1979년 용인면이 용인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용인군은 1읍 10면 108개 동을 관장하게 되었다.

1983년 수지면의 일부가 수원시로 이관되고, 외사면의 일부가 원삼면으로 이관되는 행정 개편이 있었다. 1985년 기흥면기흥읍으로 승격되었고, 1996년 용인군이 용인시로 승격되었으며, 수지면수지읍으로 승격되었다.

외사면백암면으로, 내사면양지면으로 개칭되었다. 2000년에는 구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에는 수지읍이 출장소로 승격되었다. 2005년에는 용인시에 구제가 설치되어 용인시는 3구 1읍 6면 22동을 관장하고 있다.

[지역구조]

용인은 임야가 56%를 차지하고 있으나, 산이 높지 않아 산지의 활용도가 높은 지역이다. 더구나 농경지가 22%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농경지가 많은 지역으로 옛날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이래 서울과 삼남 지방을 잇는 통로에 위치하였으나 외부와의 교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 수여선이 개통되면서 기차와 시외 승합차가 용인을 지나면서 외부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고속도로가 용인을 지나면서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특히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서울과의 접근성이 높아지고 에버랜드·양지파인리조트와 같은 관광 시설이 입지하면서 용인시는 도시 지역, 농촌 지역, 관광 지역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강남대학교·용인대학교·경찰대학교가 개교한 이후 명지대학교 분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분교 등이 개교하면서 용인은 대학도시로 변하고 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용인 지방으로 통학버스가 다니고, 대학 부근에는 하숙집 원룸과 같은 숙박업소가 늘어나면서 서비스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995년 이후 서울의 인구 분산과 중소기업의 용인 이전 등으로 용인은 인구가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다. 옛날부터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라는 특징을 가졌던 용인 지역은 무덤보다는 아파트가 더 빨리 증가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이후에는 광교지구와 동백지구 등에 전원 주택단지가 조성되고 단국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용인은 수도권에서 대도시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교통]

용인시는 조선시대 이래 서울과 삼남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에 위치하여 남북 간의 도로가 잘 발달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과 여주를 잇는 도로는 물론, 두 지역을 잇는 기차가 운행될 정도로 용인 지역의 교통은 활발하였다.

1960년대 이후 시작된 이촌향도로 용인 지역의 교통도 침체하였다. 그러다가 경부고속국도영동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서울과의 교류가 다시 활발해졌다. 용인의 도로 중 국도 45호선, 국가지원지방도 23호선·57호선·17호선 등이 남북 간의 교류를 돕고 있다. 또 국도 42호선·43호선, 지방도 82호선·84호선 등이 동서 교류를 담당하고 있다.

1990년 말 이후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교통난을 극복하기 위해 용인시는 도시철도 신분당선을 상갈까지 연장하고, 신갈에서 용인시를 거처 에버랜드까지 경전철이 곧 개통될 예정이다. 기흥에서 서울 양재까지 새로운 고속국도가 개통되었다. 용인의 도로 총 연장은 695.637㎞이고, 포장율은 77.1%이다.

[인구]

조선 세종 때 호구조사에 의하면 용인현에는 가구 221호에 인구수 535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양지현은 가구 300여 호에 인구 8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인구는 어린이와 여자가 제외되었으므로 이를 감안하여 두 지역의 인구를 계산하면 1,600호에 인구 5,000명으로 추산된다.

고종 때 인구조사 자료를 보면 인구 약 3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963년 당시 인구는 10만 2592명으로 이 중에서 용인면에 1만 4025명, 내사면에 1만 2688명, 원삼면에 1만 1063명이 집중되었다.

이들 지역에 전체 인구의 36%가 살았는데, 용인면은 용인군의 중심이었으며, 내사면원삼면에는 용인 지역 논밭의 32%가 분포하고 있었다. 1871년부터 1960년까지 인구가 배증하는 데 약 90년이 걸렸다.

1978년 용인시의 인구는 12만 2879명인데 용인면에 2만 4585명으로 전체의 20%가 집중되었다. 그리고 기흥면에 1만 6505명, 외사면에 1만 1457명이 분포하였다.

용인시의 인구는 1990년대 들어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4년에는 20만을 넘어섰는데, 1995년의 경우 전기에 비하여 용인시 인구가 2배로 증가하는 데 17년이 걸렸다. 이후 2001년에는 인구가 다시 배증하였는데, 인구가 배증하는 데 6년이 걸렸다.

2005년 이후 용인의 인구증가율은 2006년 10.1% 증가를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하여 2010년에 이르러 3% 내외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용인시의 인구는 2010년 8월말 현재 87만 4104명인데, 이 가운데 남자가 43만 6053명, 여자가 43만 8051명이다. 가구수는 31만 2,815세대이다.

[산업]

용인시는 전체 면적의 56%가 임야이고, 농경지가 전체의 22%에 불과하다. 1960년대의 통계를 보면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9.7%가 서비스업에, 그리고 1.2%가 제2차 산업에 종사하였다.

경부고속국도영동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제약회사·전기회사·제과공장 등 군소 산업체가 신갈 주변에 입주함에 따라 산업구조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는 농업 인구 80%, 서비스업 인구 18%, 제조업 인구가 2%를 기록하였다.

1980년대 이후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백암·양지 등지에 중소기업은 물론 레저산업이 입주하면서 서비스업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전기·전자 등 서울에 입지한 제조업이 용인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제조업 인구가 늘었고, 농업 인구는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2008년 말 현재 농업 인구가 3.05%, 제조업 인구가 25.1%, 서비스업이 71,9%를 차지하고 있다.

상업 시설은 조선시대 이후로 발전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4개의 시장과 13개의 점포가 있었다. 그 중에서 김량장시장이 가장 규모가 컸으며 우시장도 있었다. 인구가 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시장이 늘어 1960년대에는 6개로 늘더니, 1980년대에는 정기시장이 상설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는 상설시장 3개소, 대형 할인마트 1개소가 개점하였다. 특히 대형마트는 2001년에 3개였던 것이 지금은 11개로 늘었다.

[관광]

용인시에는 관광지가 많다. 공원·민속촌·스키장·골프장·낚시터·농원 등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에버랜드이다. 에버랜드용인시 처인구 포곡읍에 위치한 종합 행락지로, 1976년에 개점한 이래 많은 관광객이 모이고 있다.

동물원·식물원·놀이터·박물관 등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이름을 용인자연농원에서 1996년에 에버랜드로 바꾸고 시설을 보완한 바 있다. 특히 공휴일이나 어린이날에는 인파가 몰려 입장이 어려울 정도이다.

한국민속촌기흥읍에 위치한 민속전시장으로, 1974년에 우리나라 전통 문화를 소개할 목적으로 개점했다. 입장객이 꾸준히 늘고 있으며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고 있다.

양지면에 있는 양지파인리조트는 처음에는 골프장으로 등록되었다가, 1996년에 스키장도 개업한 종합 리조트장이다. 용인에는 골프장이 많기로 유명하다. 처인구에 18개, 기흥에 8개 등이 운영 중이며, 앞으로 4~5개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용인에는 문화재·국보·보물·유형문화재 등이 많다. 그중에서 와우정사처인구 해곡동에 있는 불교 사찰로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그리고 신봉동현오국사탑비, 서리에 있는 고려백자도요지, 상현동심곡서원·양지향교, 역곡동의 채제공 뇌문비, 고매동최유경 묘 등이 있다. 연평균 관광객 수는 1,000만 명에 이르며, 외국인은 그 중에서 10% 미만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3 행정구역 현행화 모현면 -> 모현읍, 이동면 -> 이동읍, 영덕동 추가
2012.03.22 인문지리/관광 에버랜드는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에 위치한 종합 행락지로, 1976년에 개점한 이래 많은 관광객이 모이고 있다.
2012.03.22 인문지리/개설 시청은 처인구 중부대로 1199[삼가동 556]에 위치하고 있다.
2011.03.09 통계 정보 수정 2010년 통계정보 반영해서 본문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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