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 동안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항일 사상이 용인 지역에서 높아져 자주 독립을 바라는 민중들의 바람이 높아졌다. 또한 1919년 1월에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일본인들이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민중들이 분노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였고 이 사실이...
-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에서 조직된 우익 민간 청년 단체. 대동청년단 어비리지단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퇴로를 막고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50년 9·28수복으로 북한군의 전선이 허리를 잘리자 경기도 용인시 지역을 중심으로 대동청년단 어비리지단이 조직되었다. 특공대 성격의 이 단체는 북쪽으로 퇴각하는 북한군의 퇴로를 막고...
-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송전리에 있었던 반공 청년 단체. 국군의 후퇴 이후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남한의 여러 지역에서 학생, 청년, 주민들을 중심으로 저항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저항 단체로는 경기도 고양 파주 지역의 태극단,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 지역의 반공투쟁 공작산악대, 강원도 춘성 북산면 수내리 지역의 반공결사대, 강원도 인제 기린면의...
-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와 백봉리에 있었던 반공 청년 단체. 국군의 후퇴 이후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남한의 여러 지역에서 학생, 청년, 주민들을 중심으로 저항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저항 단체로는 경기도 고양 파주 지역의 태극단,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 지역의 반공투쟁 공작산악대, 강원도 춘성 북산면 수내리 지역의 반공결사대, 강원도 인제...
-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용인시의 역사. 용인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이래의 변화를 거쳐 1413년(태종 13)에 등장했다. 오늘날 용인시의 영역이 형성된 것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기존의 용인군과 양지군, 죽산군의 일부가 통합됨으로써 그 모태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은 지역 내외의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 오는 가운데 형성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근영은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읽고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날 만세 시위에서 그는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을 지나 조선은행 옆까지 갔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는 조선독립선...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환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佐恒里)에서 2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시위를 선도하였다. 시위대는 원삼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모인 면민들과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이윤빈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갈월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지내던 중,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9년 11월 19일 동료 정기인(鄭基仁)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상동막리 이장 허성습(許性習)과 실촌면 상열미리 이장 강성유(姜性有)로...
-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이은표는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오전에 시작된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밤에는 인근 구봉산·독조산·수정산 등지에서 봉화를 올...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근거지로 광주·죽산·양성 등지를 넘나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부하 30~40명과 함께 친일파에 대한 징치, 일본 경찰 습격, 빈민 구제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일시적으로 관(官)에 자수하였으나, 다시 봉기하여 활약하다가 1909년 6월에 다시 붙잡...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봉은 3·1운동 당시 김량공립보통학교에 재학하던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의 만세 시위는 모현 방면에서 용인 읍내 쪽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태극기를 릴레이식으로 전달해가는 시위대가 삼계리를 거쳐 금어리에 도착하자, 이인봉은 홍종욱(洪鐘煜)·홍종엽(洪鐘燁) 형제와 함께 태극기를 받들어 들고 내사면 대대...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하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이은표(李殷杓)와 함께 시위를 계획하고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운집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밤에는 봉화 시위를 전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밤 10시경에 출동한 일본...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방(芳)·윤봉조(尹鳳朝), 자는 만위(晩瑋), 호는 춘호(春湖)·한정(漢汀)·법명(法明). 아버지는 이종백(李種百)의 아들로 이현(李賢)에게 입양되었다. 이정열은 천석꾼의 부자로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강태동(姜...
-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계몽운동가. 이정희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의 보통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면서 능원고등공민학교를 세웠다. 애향심이 남달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유달영 선생으로 하여금 「용인 애향가」를 짓도록 하여 보급에 힘썼다. 애향 정신 함양, 도덕 교육, 생활 교육에 전념했으며, 환경보호 운동에도 힘썼다....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이하경은 경기도 양평군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08년 경기도 용인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동료 6~7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 마련에 힘썼다. 그는 경기도 용인군 신원리(新院里)·자미리(自味里)·능동(陵洞)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3...
-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동한 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삼(聖三), 호는 관란(觀瀾). 초명은 정동로(鄭東魯)이다. 정관해는 경기도 용인군 지역을 중심으로 후학 양성과 전통 고수에 힘쓴 유학자로서, 일제강점 직후인 1912년부터 해방 공간인 1947년까지의 한문 일기를 남기고 있다. 일기를 통해 신식 교육의 도입으로 인성 교육을 강조하였던 전통 교육이 무너짐을...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규복은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인근의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도 큰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고향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28일 아침부터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과 수여면을 돌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기인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쇠래(釗來)에 이주해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7년 10월부터 이익삼 의병장 휘하로 들어가 동료 2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동(陵洞) 원촌(院村), 포곡면 둔전리, 수여면(水餘面) 방축리(防築里), 수여면 김량장, 하동면(下東面) 삼배위(三倍尉), 포곡면 두계위리(杜溪尉里), 광주군 상...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원경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으로 이주해온 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8년 3월경부터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김장옥·정기인 등 20여 명과 같이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 하동면 삼배위(三倍尉)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1910년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일영은 1900년 통신사(通信司) 전화과(電話課) 주사, 1904년 환구단(圜丘壇) 사제서령(祀祭署令), 봉상사(奉常司) 주사 등을 지내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해임되었다. 일제강점 후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의 성낙형(成樂馨)·김주원(金胄元) 등과 연결되어 고종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박봉래...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일(迎日). 일명 고철(高哲).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대종손으로, 아버지는 정의열(鄭義烈)이고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정철수는 1943년 12월 보성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당하였다. 중국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의 황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동료 두 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해 팔로군에 투항한 뒤,...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철화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것은 1905년이었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방인관(方仁觀) 의병부대에 가담하면서부터이다. 이전의 의병 활동 경험으로 곧바로 간부직인 서기를 맡아 의병 14명을 이끌고 경기도 여주군 이모산(二毛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또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
한국전쟁 중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에 있었던 반공 청년 단체. 국군의 후퇴 이후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남한의 여러 지역에서 학생, 청년, 주민들을 중심으로 저항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저항 단체로는 경기도 고양 파주 지역의 태극단,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 지역의 반공투쟁 공작산악대, 강원도 춘성 북산면 수내리 지역의 반공결사대, 강원도 인제 기린면의 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상근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안명옥(安明玉)·김은수(金殷秀)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많은 면민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시위대는 원삼면사무소와 문촌·고양리 등을 돌면서 크게 불어났다.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어 인근 산에 봉화를 올리며 야간 시위를 벌...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종엽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종욱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동생 홍종엽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해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시위 행진을 전개하다가...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경준은 1919년 3월 21일 이봉현(李鳳鉉)·김영달(金永達)·김성남(金性男)·이은표(李殷杓)·이용환(李容煥)·최상근(崔相根)·안명옥(安明玉)·김은수(金殷秀)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리는 등 준비를 갖춘 후 이 날 새벽 횃불을 들고 주민 200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