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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부터 경기도 용인 지역에 실시되었던 양전 사업. 1897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여 그 해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성립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부국 강병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광무 개혁(光武改革)’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토지와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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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종목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蒲谷面)에서 삼계리 주민 2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가 이끄는 시위대는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금어리(金魚里)로 진출하여 홍종욱(洪鍾煜) 형제가 이끄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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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명화는 용인군 모현면 부계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을 무렵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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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병호는 1937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주로 중국 난징[南京]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포섭하거나 남경군관학교 생도들을 모집하는 등 지하활동을 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하던 중 1944년 8월 15일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탐지를 받고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에 체포된 김병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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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남은 일찍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遠三面)에서 황경준(黃敬俊)·김은수(金殷秀)·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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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달은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황경준(黃敬俊)·김은수(金殷秀)·최상근(崔相根) 등과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 김영달은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일제 경찰들이 시위 군중을 향하여 총을 발사함에도 불구하고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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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은수는 당시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였다. 각지의 독립운동 소식을 주민들에게 전파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가운데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에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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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장옥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를 주무대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항일 유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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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주원은 대한제국의 군부 경리국 제1과장 3등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황해도 연안군과 전라남도 옥과군의 군수를 지내는 고위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중국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15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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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창연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 200여 명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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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현수는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1909년 음력 3월 10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소운동의 이재봉(李在鳳)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징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끌고 경기도 용인군 고석동(古石洞) 덕현(德峴)으로 가서 군자금 5원을 거두었다. 그 후 이익삼 의병장과 더불어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금현 김종옥(金鍾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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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교육 사업가.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국사(菊史)이다. 약천 남구만(南九萬)의 5대손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전국에 면리제(面里制)를 시행하였을 때 남계양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慕賢面)[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의 초대 면장(慕賢面長)이 되었다. 1920년 모현면장 재직시 일본을 시찰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모현면에 보통학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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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오산(午山), 이명(異名)은 남영득(南英得, 南寧得)이다. 남정각은 1913년 3월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수원·안성·용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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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있었던 일본인 농장. 단파농장은 토지 개간 및 일반 농업 경영, 조림(造林) 및 토지의 매매, 대차(貸借), 농산물 가공 판매 등과 관련된 사업을 하였던 일본인 농장이다. 1923년 5월 3일 단파직태랑(丹波直太郞)이 자본금 70,000원으로 설립한 합자 회사로,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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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신순용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후 용인·광주·앙지·죽산·양성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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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의인. 심운탁은 일제강점기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등 선행을 베푼 사람이다. 그의 선행으로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시미리 마을 앞에 1928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졌다. 그 비의 앞면을 보면, ‘전참봉 심공운탁 영세불망비(前參奉沈公雲倬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저 크신 심공, 선을 좋아하고 베풀기를 즐거워하니 그 소리 하늘에 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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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동한 천주교 신부이자 독립운동가. 안학만은 경기도 안성본당에서 세례를 받고 1909년 9월 예수 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선산본당과 개성본당 주임신부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경기도 용인군의 앞고지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안학만은 천주교 신부로서 사목 활동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신자들과 지역 유지 및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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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시당(時堂), 이명(異名)은 조현(祖鉉, 肇鉉)이다. 여준은 1906년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과 함께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2년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강습소의 유지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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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한말의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이다.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서로군정서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들이 노령으로 이동할 때 조직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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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의선은 1919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 2·8독립선언이 있자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기도 대표 신석우(申錫雨)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이 되었으며,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세칙제정위원회 위원, 예산결산위원장 등에 선임되어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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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오경수(吳敬秀)이다. 오인수는 18세부터 포수들이 모여 솜씨를 자랑하는 화포계(火砲契)에 참여하여 늘 1등을 차지하는 등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안성(安城)·죽산(竹山)·양지(陽智)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경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의병장 정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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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말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의 손녀이며,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오광선(吳光鮮)의 장녀이다. 오희영은 1940년 오광심(吳光心)·김효숙(金孝淑) 등과 중국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였다. 그녀는 광복군 제3지대가 있었던 중국 푸양[阜陽]에서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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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말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의 손녀이며,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오광선(吳光鮮)의 차녀이다. 1939년 4월 중국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대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연극·무용 등의 문화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일본군의 정보 수집과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역할을 도왔다. 청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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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 있었던 금융 조합. 일제강점기에 일반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근대적 금융기관은 금융조합이었다. 금융조합은 일제가 통감부 시기 한국 경제의 식민지적 재편과 식민지 산업 정책을 뒷받침 할 산업 금융기관의 일환으로 설립된 농공은행(1906)의 보조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즉, 농공은행은 농공업의 개량 발달을 표방하며 주요 도시에 세워졌고 농공은행이 포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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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군에 조직되었던 농회. 농회는 식민 농업정책의 말단기관으로서 일제가 한국 농민을 통제하고 수탈할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일제는 1910~20년대에 산업단체가 난립함에 따라 통제의 어려움을 느끼고 제1차 산업단체 정리 방침을 표명하였다. 이에 따라 1926년 1월 25일 조선농회령을 발포하면서 계통농회를 설립하여 농사·면직·양잠 부문의 산업단체를 정리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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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군에 가마니 생산과 판매를 위해 결성하였던 조합. 일제가 부업을 장려한다는 명목으로 한국 농민의 잉여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일제는 부업을 장려하여 농가경제를 향상시킨다는 명목 하에 한국 농민의 잉여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해 1917~1918년경부터 적극적으로 가마니짜기를 강조하였다. 이에 가마니의 생산과 판매의 합리화를 꾀하고자 군 단위로 승입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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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군에 조직된 축산 조합. 일제가 소의 증식과 개량을 통해 식민지 수탈을 꾀할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11년에 경기도 개성군에 축산조합이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913년 시흥군·포천군·광주군·파주군에 설치되었고 1915년 용인군 외 14개군에 설치되었다. 이후 경기도 지역에 설립되었던 20여 개의 축산조합은 「조선중요물산동업조합령」에 따라 축산동업조합으로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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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 조직된 학교 조합. 일제가 일본인 아동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용인학교조합은 1913년 4월 경기도 용인군 지역에 사는 일본인 아동들을 위하여 설치되었으며, 5월에는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에 용인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는 한국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1912년 학교조합령을 제정하고 학교조합을 공적기관으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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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기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진. 경기도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면서 8월에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주로 유격전으로 일제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밖에 일진회 등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빈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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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정주원(鄭周源)[1870~1908]은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사람이다. 그는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8월에 떨쳐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였다. 정주원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정주원은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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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하면서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내정간섭을 감행하는 양면 전략으로 한국 침략을 강화하였다. 즉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침략을 강화하자 극동에 진출해 있던 러시아를 비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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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경기도 용인 지역에 일어났던 의병 항쟁.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시켰으며, 5월 말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905년 들어 일본은 청과의 봉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화시켜 11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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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 있었던 교육 기관. 청년훈련소는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일본어 등 기초적인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청년훈련소는 원래 서울을 비롯한 인천·개성 등지에서 일본인들의 제국재향군인분회장(帝國在鄕軍人分會長)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말기에 들어 한국인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청년훈련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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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황명운은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정주원(鄭周源)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그가 참가한 정주원 의병부대는 1907년 8월에 거의하여 용인·죽산·안성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배를 타고 충청남도 당진·서산 등지에까지 진출하면서 대일 항전을 하였다. 이같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의병부대는 190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