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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강복선은 27세 때인 1908년 4월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가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2차 의병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다.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을 모집하고 교전 활동을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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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 있었던 시장. 개천장은 양지와 이천의 경계에 위치했던 장시이다. 개천장은 설시(設市)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신설되었다가, 경기도 이천 오천장의 설시와 함께 이설·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개시일은 4일과 9일의 5일장이었다. 개천장에서 거래되었던 물품은 쌀·면포·마포·과일·어염·연초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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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군 고삼면에 있었던 광산. 고삼면 광산은 원삼면 광산과 함께 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에서 운영된 대표적인 광산이었다. 당시 고삼면은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된 이래로 고서면, 고북면, 고동면을 합친 지역으로 경기도 용인군에 편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산의 위치는 경기도 용인군의 고삼면과 경기도 안성군의 양성면에 걸쳐 있었다. 광산의 소유주는 경기도 안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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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소년회가 개최하였던 교육 행사. 김량동화회는 1920년대 이후 전국에서 활발히 전개된 소년운동의 일환으로 개최된 교육 행사이다. 당시 소년운동은 유교 윤리의 폐습과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으로부터 조선의 소년·소녀들을 해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근대 교육을 통하여 소년·소녀들이 자유로운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끄는 반봉건 근대화운동이자, 반일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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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사근은 농사를 짓다가 1907년 임오교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수백 명의 의병들과 함께 경기도 죽산·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초에는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용인·죽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원 의병부대가 당진 주재소를 습격하는 반일 항전을 일으켰을 때 여본구리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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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김순일은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장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8월에는 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군대 해산은 이전의 의병 운동을 의병 전쟁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투쟁에 가담하였다.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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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재천은 26세의 나이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제2차 용인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제2차 의병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으며,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 모집과 교전 활동을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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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김정석은 출생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장한 후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동진리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한편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이덕경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이 되었다. 이덕경의 의병 활동으로 현재 알려진 것은 주로 군수품 확보 투쟁에 관한 것이다. 1909년 6월 의병장 이덕경 및 동료 의병 1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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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오석(吾石, 烏石), 본명은 김학소(金學韶)이다. 김혁은 1875년 10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1900년 1월 육군 참위로 임관, 육군정위로 군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항일 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인 경기도 용인으로 돌아왔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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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역량이 도시와 농촌, 사상과 종교, 계층과 계급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을 위한 교육활동과 사회사업을 전개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25년 10월 한통문(韓通文), 조병주(趙炳柱) 등이 발기하여 설립하였다. 회원은 100여 명에 달했다. 야학부를 설치하여 청년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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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남현수는 경기도 이천군 장면 사곡동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07년 이익삼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이후 고향인 경기도 용인군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남현수는 부대 내에서 군수품 확보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윤2월 의병장 이익삼 등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금현에 진출하여 김종옥으로부터 백미 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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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이거나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용인의 독립운동가는 의병부대 및 항일 무장단체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 밖에도 언론·외교 활동을 통해 국권 피탈의 상황을 국내외에 알려 독립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 우선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면, 용인 지역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약한 임옥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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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해사(海史), 이명(異名)은 공유(公有)·성호(性浩)이다. 맹철호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단에 입단하였으며, 4월 만주 각지에 산재한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로써 대한독립단 집안(輯安) 및 환인현(桓仁縣)의 총지단장에 피임되었다. 그 후 일본인 단체인 일민단(日民團)을 격파하고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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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민족 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벌인 국권 회복 운동.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대 민족 자본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취지 하에 조만식, 김동원 등이 평양에서 물산장려회를 조직하면서 촉발되었다. 일제의 수탈 정책 하에 경제적 자립을 꾀하고자 한 이 운동은 국산품 장려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1923년에는 전국적 조직체인 물산장려회가 조직되고 각 지방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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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박춘식은 경기도 용인군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07년 7월 김봉기 의병부대에 들어가 군자금 확보와 의병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는 동료 의병과 함께 광주·양천·지평·가평·춘천·횡성·화천·양구 등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양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가평 실운리에 있는 명례궁(明禮宮) 사음(舍音) 집에서 백미 50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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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송교원은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정주원 의병부대는 임옥여 의병부대·이익삼 의병부대와 함께 2차 용인의병운동(1904~1909)을 이끈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죽산·양지 외에 수원·안성·당진·면천·풍도·서산까지 넓은 활동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주원 의병부대의 활동은 크게 일본군과의 교전을 통한 대일 항쟁과 이를 뒷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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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송금봉은 박춘식의 권유에 의해 의병이 되었다. 그는 김봉기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주·용인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박춘식·홍금만·유태수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주로 군자금을 수집하면서 대일 항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11일 경기도 용인군 마가리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또 경기도 광주군 전지리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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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부터 1972년까지 운행된, 경부선 수원역을 기점으로 용인을 지나 이천·여주에 이르는 증기 및 가솔린 병용 철도. 연장 73.4㎞, 궤간 0.762m의 증기 및 가솔린 병용 철도로, 수려선철도의 노선은 수원-동수원-원천-덕곡-신갈-어정-삼가-용인-마평-양지-제일-추계-오천-표교-유산-이천-무촌-죽랑-매류-신대-여주이다. 총 운행 시간은 2시간 23분이며, 1938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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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안춘경은 정주원 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의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경기도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조직이 확대되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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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양지리에 선정된 갱생지도부락.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말 농업 공황으로 농촌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일환으로 1930년대 들어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였으며, 농촌경제갱생계획에 따라 갱생지도부락을 선정하였다. 관제기구로 농촌진흥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각 읍면별로 30~40호 단위의 갱생지도부락을 선정하여 5년 기한의 농가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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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일대의 소작농들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상대로 일으킨 소작쟁의. 1930년대 초 세계 경제공황의 여파로 인해, 조선에서는 쌀값이 폭락하고 농민의 부채가 가중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1930년대 경기도 용인시의 농민운동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1930년대 경기도 용인시의 경작면적은 경기도 전체 면적에 비해 매우 영세한 규모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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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 있었던 금융 신탁 회사. 일제강점기에 용인군에 본점을 둔 회사는 기흥면 서천리의 용수흥업주식회사를 포함하여 내사면 남곡리의 단파농장, 수여면 김량장리의 중앙자동차, 용인면 김량장리의 용인임산 등 4개가 있었다. 1925년 5월 10일 기흥면 서천리에 자본금 200,000원으로 설립되었으며 회사 대표는 오성선이었다. 금융 신탁회사로 주로 농업 자금을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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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체육 행사. 용인소년축구대회는 192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활발히 전개된 소년운동의 일환으로 용인청년회가 개최하려고 준비한 체육 행사이다. 소년운동단체인 용인청년회에서는 각급 학교나 소년회 등을 대상으로 각종 운동 경기를 개최하였다. 1927년 6월 26일에는 수원, 진위, 안성, 여주, 이천, 광주 등 인근 지역과 용인축구대회 개최를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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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 있었던 농림업 관련 회사. 일제강점기에 용인군에 본점을 둔 회사는 용인면 김량장리의 용인임산을 포함하여 기흥면 서천리의 용수흥업주식회사, 내사면 남곡리의 단파농장, 수여면 김량장리의 중앙자동차 등 4개가 있었다. 1940년 11월 17일 일본인 평산충일(平山忠一)에 의해 자본금 100,000원으로 설립된 용인임산은 임산물의 처분, 임산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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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역량이 도시와 농촌, 사상과 종교, 계층과 계급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분위기 속에서, 용인의 중추기관이 되고자 설립을 꾀하였다. 용인청년구락부는 3·1운동 후 청년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창립할 계획에 있었으나, 일제 측의 제재로 설립이 중단되었다. 경기도 용인시 지역의 청년운동 단체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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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용인청년회는 1920년대 결성된 청년단체로, 전신인 갑성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야학활동과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역량이 도시와 농촌, 사상과 종교, 계층과 계급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분위기 속에서, 용인의 중추기관이 되어 신사상운동에 주력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24년 3월 유재헌(劉載獻)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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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우덕순은 본래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어매동에 거주하는 농부였는데, 1907년 김순일 의병부대에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1907년 11월과 1908년 7월경에 각각 300냥을 모금하여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에 대한 군자금 및 군수품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1908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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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우수안은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어매동에 거주하는 농부였다. 한일의정서 체결과 고문 정치로 대변되는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정치·군사적 간섭이 강화되던 시기에 의병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용인군 지역에서는 일본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경의선·경원선 철도 부설 추진과 이에 따른 인력 강제동원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에 저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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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석농(石儂), 자는 경집(敬集)이다. 유근은 1898년 5월 남궁억·나수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5년 11월에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매국 관료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황제와 각부 대신들을 협박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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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유태수는 박춘식·홍금만·송금봉 등과 함께 김봉기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주·용인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주로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대일 항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11일 경기도 용인군 성산리와 마가리에서 군자금 마련에 공을 세웠고, 경기도 광주군 전지리에 있는 서랑청의 집에서 다시 군자금을 수합하다가 피체되었다. 이로써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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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이금만은 1907년 7월 윤성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용인·여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경기도 여주군 일본 경찰분파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2명을 총기로 사살하는 등 무장 투쟁을 벌였다. 또 경기도 용인군 두미동에 들어가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피체되었다. 그는 1908년 3월 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종신유형을 받았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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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과 남사면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역량이 도시와 농촌, 사상과 종교, 계층과 계급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분위기 속에서, 시의적(時宜的) 습관의 개량 및 지방산업 발전을 꾀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사청지회는 1916년 1월 23일 신현정(申鉉鼎), 김교면(金敎冕), 구영회(具永會)를 비롯한 12명이 발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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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이치옥은 농사를 짓다가 1908년 2월 경기도 통진군 학당골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장 정용대 부대에 투신하면서 의병이 되었다. 이치옥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통진·고양·교하 등지이다. 1908년 4월 동료 의병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에 진출하여 군수품을 수집하였고, 의병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를 응징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25일 피체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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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다. 이한응은 1892년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한성부주사와 관립영어학교 교관을 거쳐,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1904년에는 서리공사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일본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뒤이어 외국인 고문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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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역량이 도시와 농촌, 사상과 종교, 계층과 계급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분위기 속에서, 지식 계발, 산업 진흥, 상호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신친목회는 남태원(南台元)과 정의열(鄭義烈)을 각각 회장, 총무로 하여 1922년 10월 29일에 창립되었다.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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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기도 용인의 역사. 경기도 용인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과 같은 반일 민족 운동이나 소년 운동, 청년 운동 등과 같은 반봉건적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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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임허옥은 1907년 8월 윤관문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용인·안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동지 6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요봉동을 거쳐 곽이동과 업이동에서 군자금품을 징수하였다. 이틀 후 안성군으로 가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탈출하여 그 해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8년 4월 다시 의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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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대준은 경기도 용인군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던 정주원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을 알 수는 없으나, 정주원 부대에 속했던 죽산 출신 의병 신현구[1878~1909] 등과 함께 1909년 6월 3일에 경기도 죽산군 서삼면 시암장 내 여인숙 김운선 집에 들어가 일본인 중원방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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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조성습은 제2차 용인의병(1904~1909)을 이끈 정주원 의병부대 소속이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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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조윤봉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곡리로 이주하여 살다가 1908년 2월 이익삼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는 의병 운동에 필요한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매진하였다. 의병이 된 직후 동료 의병 22명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수반리에 진출하여, 이장 마춘화를 통해 주민으로부터 군자금 25원을 확복하고, 곧이어 같은 면 역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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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역량이 도시와 농촌, 사상과 종교, 계층과 계급을 막론하고 확대되는 분위기 속에서, 풍속을 교정하고 생활 개선, 지식 보급, 식산흥업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좌항진흥회는 1925년 8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좌항리에 창립되었다. 좌항진흥회의 발기인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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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에 설립되었던 운송회사. 중앙자동차주식회사는 경기도 용인군에 본점을 둔 4개의 근대식 회사 중 하나로, 여객과 화물 운송을 담당하였다. 1930년 1월 25일 송재구(宋在龜), 남상학(南相鶴), 박복녀(朴福女), 이원익(李源翊) 등에 의해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에 세워졌으며, 자본금 65,000원을 기반으로 한 주식회사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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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청년들의 사회 운동. 1920년대 청년운동은 3·1운동 이후 대중운동이나 사회운동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는 흐름 속에서 출현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에 의해 국내의 계몽운동과 교육·언론 활동이 탄압받던 분위기와 달리 3·1운동 이후에는 국내 보통학교 수가 증가하고 야학 등의 교육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각지의 청년 단체들이 결성되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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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최국만은 정주원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51세의 나이로 의병 활동을 하던 그는 1908년 12월 23일 경기도 평택군 남면 월정리 양석환의 집에서 군자금을 징취하였다가 탐지되어 일본인 수사와 헌병대 합동수사대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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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한순팔은 용인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인 정주원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출생과 경력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순팔이 가담한 정주원 의병부대가 서용범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양지·양성에서 또한 150명을 인솔한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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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홍금만은 1907년 7월 19일 정철화 의병부대가 마을을 지날 때, 부대의 짐꾼으로 역할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기도 죽산, 충청도 충주·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충주 방여탄에서 일본군과 교전할 때 부대와 떨어지게 되어 일시 귀향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2월 경기도 용인군 출신의 의병 박춘식의 권유를 받고 유태수·송금봉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