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강복선은 27세 때인 1908년 4월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가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2차 의병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다.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을 모집하고 교전 활동을 벌...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종목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蒲谷面)에서 삼계리 주민 2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가 이끄는 시위대는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금어리(金魚里)로 진출하여 홍종욱(洪鍾煜) 형제가 이끄는 200...
-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이고 1896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 남강 이승훈이 건립하여 민족 교육을 펼친 오산학교를 3회로 졸업하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있던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 여준에 의해 죽산군 원삼면 능골[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릉리]에 있던 삼악학교와 만주 통화현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
-
일제강점기 용인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도태[1891~1956]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1910년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0~1912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삼악학교(三岳學校)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12년에는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3년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왔다가, 1916년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명화는 용인군 모현면 부계리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을 무렵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병호는 1937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주로 중국 난징[南京]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포섭하거나 남경군관학교 생도들을 모집하는 등 지하활동을 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하던 중 1944년 8월 15일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탐지를 받고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에 체포된 김병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형을...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사근은 농사를 짓다가 1907년 임오교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수백 명의 의병들과 함께 경기도 죽산·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초에는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용인·죽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주원 의병부대가 당진 주재소를 습격하는 반일 항전을 일으켰을 때 여본구리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남은 일찍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遠三面)에서 황경준(黃敬俊)·김은수(金殷秀)·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김순일은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부대장이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8월에는 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군대 해산은 이전의 의병 운동을 의병 전쟁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투쟁에 가담하였다.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달은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황경준(黃敬俊)·김은수(金殷秀)·최상근(崔相根) 등과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 김영달은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일제 경찰들이 시위 군중을 향하여 총을 발사함에도 불구하고 시위...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은수는 당시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였다. 각지의 독립운동 소식을 주민들에게 전파하면서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던 가운데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에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안명...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장옥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용인·광주·양지·죽산·양성 등지를 주무대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였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항일 유격...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재천은 26세의 나이에 이익삼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제2차 용인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제2차 의병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부대로, 30~40명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활동지는 경기도 광주·용인·죽산·양성 등지였으며, 1908년 1월에서 1909년 6월까지 군수금 모집과 교전 활동을 벌이다...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김정석은 출생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장한 후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동진리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한편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이덕경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이 되었다. 이덕경의 의병 활동으로 현재 알려진 것은 주로 군수품 확보 투쟁에 관한 것이다. 1909년 6월 의병장 이덕경 및 동료 의병 1명과...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주원은 대한제국의 군부 경리국 제1과장 3등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황해도 연안군과 전라남도 옥과군의 군수를 지내는 고위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중국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다가, 1915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창연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 200여 명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의 금령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장. 본관은 언양.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이다. 증조부는 김응복(金應福), 할아버지는 김식(金湜), 아버지는 김중기(金重器)이며, 외할아버지는 이용(李蓉), 부인은 박덕창(朴德昌)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1592년...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장. 본관은 서흥(瑞興). 자(字)는 여문(汝文), 호(號)는 창죽헌(倉竹軒)이다. 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 김린(金燐)이다. 죽산부 양지현(陽智縣) 월노동(月老洞)[현재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에서 태어났다. 1555년(명종 10) 6세 때 서당(書堂)에서 글을 깨우쳐 즉흥시를 지었으며, 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그 슬픈...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서흥(瑞興). 할아버지는 충무위 부사과 김린(金燐)이고, 아버지는 김충수(金忠守)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버지 김충수가 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하여 10월 말경에 죽산(竹山)의 청용산(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옥신리 경계)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倭將) 후쿠시마 마...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오석(吾石, 烏石), 본명은 김학소(金學韶)이다. 김혁은 1875년 10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1900년 1월 육군 참위로 임관, 육군정위로 군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항일 투쟁을 결심하고 고향인 경기도 용인으로 돌아왔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김현수는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1909년 음력 3월 10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소운동의 이재봉(李在鳳)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징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끌고 경기도 용인군 고석동(古石洞) 덕현(德峴)으로 가서 군자금 5원을 거두었다. 그 후 이익삼 의병장과 더불어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금현 김종옥(金鍾玉...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오산(午山), 이명(異名)은 남영득(南英得, 南寧得)이다. 남정각은 1913년 3월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수원·안성·용인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배부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만세...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남현수는 경기도 이천군 장면 사곡동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07년 이익삼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이후 고향인 경기도 용인군에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남현수는 부대 내에서 군수품 확보에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윤2월 의병장 이익삼 등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금현에 진출하여 김종옥으로부터 백미 3석...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해사(海史), 이명(異名)은 공유(公有)·성호(性浩)이다. 맹철호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단에 입단하였으며, 4월 만주 각지에 산재한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로써 대한독립단 집안(輯安) 및 환인현(桓仁縣)의 총지단장에 피임되었다. 그 후 일본인 단체인 일민단(日民團)을 격파하고 독...
-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의병. 1727년(영조3) 청주에서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때 문성천은 양지현(지금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에 거주하던 가의대부(嘉義大夫) 주헌(朱櫶)이 의병을 모집하자 그를 도와 좌찬현(佐贊峴)에서 서울로 진격하는 적을 막고 수백 여 명을 죽였다. 이 일이 임금께 보고되었으나 상을 받지 못하였다가, 1785년 경기관찰사 서...
-
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남평. 자는 순해(舜諧) 또는 순서(舜瑞), 호는 휴헌(休軒). 아버지는 현령 문위세(文緯世)이며, 큰아버지인 첨지중추부사 문위지(文緯地)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용인향교의 학생으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문위세와 함께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용담(龍潭)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치열한 항전을 벌였고 세 번이나 크게 적을...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박춘식은 경기도 용인군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07년 7월 김봉기 의병부대에 들어가 군자금 확보와 의병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는 동료 의병과 함께 광주·양천·지평·가평·춘천·횡성·화천·양구 등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양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가평 실운리에 있는 명례궁(明禮宮) 사음(舍音) 집에서 백미 50석을...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송교원은 정주원 의병부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정주원 의병부대는 임옥여 의병부대·이익삼 의병부대와 함께 2차 용인의병운동(1904~1909)을 이끈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죽산·양지 외에 수원·안성·당진·면천·풍도·서산까지 넓은 활동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주원 의병부대의 활동은 크게 일본군과의 교전을 통한 대일 항쟁과 이를 뒷받...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송금봉은 박춘식의 권유에 의해 의병이 되었다. 그는 김봉기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주·용인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박춘식·홍금만·유태수 등 동료 의병들과 함께 주로 군자금을 수집하면서 대일 항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11일 경기도 용인군 마가리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또 경기도 광주군 전지리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신순용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의병에 투신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후 용인·광주·앙지·죽산·양성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진회 등의 친일 분자를 처단하는 등...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안춘경은 정주원 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의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경기도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점차 조직이 확대되어 9...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언남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어대선은 200여년 조상대대로 살아온 현 기흥구 언남동에서 태어나 인근 용인향교에서 수학한 후 서울에 이거 생활하면서 1906년 용인향교에 맹보순이 설립한 명륜학교에 들러 후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함종, 호는 시제(時齊). 아버지 어윤응(魚允應)과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시당(時堂), 이명(異名)은 조현(祖鉉, 肇鉉)이다. 여준은 1906년 이상설(李相卨)·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 등과 함께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2년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강습소의 유지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한말의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이다.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서로군정서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들이 노령으로 이동할 때 조직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의선은 1919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 2·8독립선언이 있자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기도 대표 신석우(申錫雨)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이 되었으며,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세칙제정위원회 위원, 예산결산위원장 등에 선임되어 활...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명은 오경수(吳敬秀)이다. 오인수는 18세부터 포수들이 모여 솜씨를 자랑하는 화포계(火砲契)에 참여하여 늘 1등을 차지하는 등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안성(安城)·죽산(竹山)·양지(陽智)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경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의병장 정철화(...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말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의 손녀이며,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오광선(吳光鮮)의 장녀이다. 오희영은 1940년 오광심(吳光心)·김효숙(金孝淑) 등과 중국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였다. 그녀는 광복군 제3지대가 있었던 중국 푸양[阜陽]에서 일본군 내의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공...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한말 의병장 오인수(吳寅秀)의 손녀이며,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오광선(吳光鮮)의 차녀이다. 1939년 4월 중국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대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연극·무용 등의 문화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일본군의 정보 수집과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역할을 도왔다. 청년공...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우덕순은 본래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어매동에 거주하는 농부였는데, 1907년 김순일 의병부대에 필요한 군자금을 확보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1907년 11월과 1908년 7월경에 각각 300냥을 모금하여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의병들에 대한 군자금 및 군수품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1908년 1...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우수안은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어매동에 거주하는 농부였다. 한일의정서 체결과 고문 정치로 대변되는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일제의 정치·군사적 간섭이 강화되던 시기에 의병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용인군 지역에서는 일본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경의선·경원선 철도 부설 추진과 이에 따른 인력 강제동원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에 저항하는...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용인 전투에 참여한 의병.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광보(廣甫).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의 차남으로 태어나 큰집인 원수량의 양자로 갔다.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된 원균(元均)의 동생이다. 경기도 송탄시 도일동(현재 경기도 평택시 송탄동)에서 태어났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임...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석농(石儂), 자는 경집(敬集)이다. 유근은 1898년 5월 남궁억·나수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5년 11월에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매국 관료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황제와 각부 대신들을 협박한 사실...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근영은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읽고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날 만세 시위에서 그는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을 지나 조선은행 옆까지 갔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는 조선독립선...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장. 본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묵계(墨溪)이다. 할아버지는 부제학 유윤덕(柳潤德)이고, 생부(生父)는 유성(柳城), 양부는 참봉인 유지(柳墀)이다. 유복기(柳復起)와 유복립(柳復立) 형제는 외가에 맡겨져 외조부의 손에서 컸으며 외숙인 학봉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음보로 종부시주부(宗溥寺主簿)가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유태수는 박춘식·홍금만·송금봉 등과 함께 김봉기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경기도 광주·용인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주로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대일 항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11일 경기도 용인군 성산리와 마가리에서 군자금 마련에 공을 세웠고, 경기도 광주군 전지리에 있는 서랑청의 집에서 다시 군자금을 수합하다가 피체되었다. 이로써 1908...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이금만은 1907년 7월 윤성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용인·여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경기도 여주군 일본 경찰분파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2명을 총기로 사살하는 등 무장 투쟁을 벌였다. 또 경기도 용인군 두미동에 들어가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피체되었다. 그는 1908년 3월 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종신유형을 받았다. 현재...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용환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佐恒里)에서 2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시위를 선도하였다. 시위대는 원삼면사무소까지 진출하여 그 곳에 모인 면민들과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약한 의병. 이윤빈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갈월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지내던 중,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1909년 11월 19일 동료 정기인(鄭基仁)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상동막리 이장 허성습(許性習)과 실촌면 상열미리 이장 강성유(姜性有)로...
-
일제강점기 용인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이은표는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최상근(崔相根)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주도하였다. 오전에 시작된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밤에는 인근 구봉산·독조산·수정산 등지에서 봉화를 올...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경기도 용인군을 근거지로 광주·죽산·양성 등지를 넘나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부하 30~40명과 함께 친일파에 대한 징치, 일본 경찰 습격, 빈민 구제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07년 11월 일시적으로 관(官)에 자수하였으나, 다시 봉기하여 활약하다가 1909년 6월에 다시 붙잡...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봉은 3·1운동 당시 김량공립보통학교에 재학하던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의 만세 시위는 모현 방면에서 용인 읍내 쪽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태극기를 릴레이식으로 전달해가는 시위대가 삼계리를 거쳐 금어리에 도착하자, 이인봉은 홍종욱(洪鐘煜)·홍종엽(洪鐘燁) 형제와 함께 태극기를 받들어 들고 내사면 대대...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하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이은표(李殷杓)와 함께 시위를 계획하고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운집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으며 밤에는 봉화 시위를 전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밤 10시경에 출동한 일본...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방(芳)·윤봉조(尹鳳朝), 자는 만위(晩瑋), 호는 춘호(春湖)·한정(漢汀)·법명(法明). 아버지는 이종백(李種百)의 아들로 이현(李賢)에게 입양되었다. 이정열은 천석꾼의 부자로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강태동(姜...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이치옥은 농사를 짓다가 1908년 2월 경기도 통진군 학당골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장 정용대 부대에 투신하면서 의병이 되었다. 이치옥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통진·고양·교하 등지이다. 1908년 4월 동료 의병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에 진출하여 군수품을 수집하였고, 의병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를 응징하기도 하였다. 1908년 9월 25일 피체되어...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이하경은 경기도 양평군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08년 경기도 용인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동료 6~7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 마련에 힘썼다. 그는 경기도 용인군 신원리(新院里)·자미리(自味里)·능동(陵洞)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3...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이다. 이한응은 1892년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한성부주사와 관립영어학교 교관을 거쳐,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1904년에는 서리공사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일본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뒤이어 외국인 고문에 관...
-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는 이준상(李駿相), 아버지는 이복영, 어머니는 정창학이며, 처 심재성과의 사이에 2녀인 이화순, 이오동이 있다. 이홍광은 1910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홍규(李鴻圭)이다. 1919년에 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며 1926년 가족과 함께 극심한 생활고와 일제의 탄압을 피해...
-
구한말 용인 지역의 항일의병장.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각지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용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3대 독립운동가문을 배출 했을 만큼 용인 지역은 항일투쟁의 선봉에 있었는데, 옥여 임경재 의병장도 대표적인 한일의병의 선구자이다. 항일의병으로 양지군 주동면 평촌동[지금의 양지면 평창리]에 거주하였다. 본명은 경재(景宰), 대대로 무관장(武官將...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임허옥은 1907년 8월 윤관문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용인·안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동지 6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요봉동을 거쳐 곽이동과 업이동에서 군자금품을 징수하였다. 이틀 후 안성군으로 가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탈출하여 그 해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8년 4월 다시 의병부...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규복은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인근의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에서도 큰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고향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28일 아침부터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과 수여면을 돌면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기인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쇠래(釗來)에 이주해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7년 10월부터 이익삼 의병장 휘하로 들어가 동료 2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동(陵洞) 원촌(院村), 포곡면 둔전리, 수여면(水餘面) 방축리(防築里), 수여면 김량장, 하동면(下東面) 삼배위(三倍尉), 포곡면 두계위리(杜溪尉里), 광주군 상...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대준은 경기도 용인군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던 정주원 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을 알 수는 없으나, 정주원 부대에 속했던 죽산 출신 의병 신현구[1878~1909] 등과 함께 1909년 6월 3일에 경기도 죽산군 서삼면 시암장 내 여인숙 김운선 집에 들어가 일본인 중원방길(中...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정원경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으로 이주해온 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8년 3월경부터 이익삼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김장옥·정기인 등 20여 명과 같이 경기도 용인군 수여면 김량장리, 하동면 삼배위(三倍尉)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1910년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일영은 1900년 통신사(通信司) 전화과(電話課) 주사, 1904년 환구단(圜丘壇) 사제서령(祀祭署令), 봉상사(奉常司) 주사 등을 지내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해임되었다. 일제강점 후 1915년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의 성낙형(成樂馨)·김주원(金胄元) 등과 연결되어 고종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박봉래...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장. 정주원(鄭周源)[1870~1908]은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하수리(荷壽里) 사람이다. 그는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8월에 떨쳐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였다. 정주원은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정주원은 190...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일(迎日). 일명 고철(高哲).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대종손으로, 아버지는 정의열(鄭義烈)이고 어머니는 경주김씨이다. 정철수는 1943년 12월 보성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당하였다. 중국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의 황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동료 두 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해 팔로군에 투항한 뒤,...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철화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것은 1905년이었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방인관(方仁觀) 의병부대에 가담하면서부터이다. 이전의 의병 활동 경험으로 곧바로 간부직인 서기를 맡아 의병 14명을 이끌고 경기도 여주군 이모산(二毛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또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소재 양지초등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에서 태어나 매송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외가댁인 양지면 양지리에서 양지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하여 양지보통학교에서 졸업하였다. 양지보통학교는 친일파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적극 지원하던 학교로, 송종헌이 양지면 추계리 별장에 올 때는 학교 학생들이 일장기를...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조성습은 제2차 용인의병(1904~1909)을 이끈 정주원 의병부대 소속이었다. 정주원은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 등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1907년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경기도의 용인·양지·양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부대 규모는 용인 굴암에서 조직된 30여 명 정도였으나, 이후 양지·양성에서 약 150여 명으로 증가...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조윤봉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곡리로 이주하여 살다가 1908년 2월 이익삼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는 의병 운동에 필요한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매진하였다. 의병이 된 직후 동료 의병 22명과 함께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수반리에 진출하여, 이장 마춘화를 통해 주민으로부터 군자금 25원을 확복하고, 곧이어 같은 면 역동에서...
-
조선 후기 용인 출신의 의병.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 때 의병을 모집하여, 문성천(文星天)과 함께 죽산현과 양지현 부근의 좌찬현(左贊峴)에서 수백 명의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원종록에 들었으며, 사후인 1788년(정조 12)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증직되었다....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최국만은 정주원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51세의 나이로 의병 활동을 하던 그는 1908년 12월 23일 경기도 평택군 남면 월정리 양석환의 집에서 군자금을 징취하였다가 탐지되어 일본인 수사와 헌병대 합동수사대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상근은 1919년 3·1운동 당시 황경준(黃敬俊)·안명옥(安明玉)·김은수(金殷秀)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1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많은 면민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시위대는 원삼면사무소와 문촌·고양리 등을 돌면서 크게 불어났다.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어 인근 산에 봉화를 올리며 야간 시위를 벌...
-
조선 말기 용인에서 활동한 의병. 한순팔은 용인의 대표적인 의병부대인 정주원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출생과 경력을 확인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의병 활동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순팔이 가담한 정주원 의병부대가 서용범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양지·양성에서 또한 150명을 인솔한 점에서...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홍금만은 1907년 7월 19일 정철화 의병부대가 마을을 지날 때, 부대의 짐꾼으로 역할하면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기도 죽산, 충청도 충주·청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충주 방여탄에서 일본군과 교전할 때 부대와 떨어지게 되어 일시 귀향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2월 경기도 용인군 출신의 의병 박춘식의 권유를 받고 유태수·송금봉과 함...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종엽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종욱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동생 홍종엽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해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시위 행진을 전개하다가...
-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경준은 1919년 3월 21일 이봉현(李鳳鉉)·김영달(金永達)·김성남(金性男)·이은표(李殷杓)·이용환(李容煥)·최상근(崔相根)·안명옥(安明玉)·김은수(金殷秀)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산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리는 등 준비를 갖춘 후 이 날 새벽 횃불을 들고 주민 200여...
-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의병. 황명운은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정주원(鄭周源)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그가 참가한 정주원 의병부대는 1907년 8월에 거의하여 용인·죽산·안성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배를 타고 충청남도 당진·서산 등지에까지 진출하면서 대일 항전을 하였다. 이같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의병부대는 190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