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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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欣仁 |
영어음역 | O Heun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고려 후기 여수현령을 역임한 문신.
[개설]
오흔인이 여수현령 신분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 세력에게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여수 지역 민중의 호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오흔인의 후손들은 율촌 지역에 전향정(荃香亭)을 짓고 벼슬길로 나가지 못한 채 방외인으로서 독서와 시문으로 여생을 보내게 되며, 손자인 오치신(吳致臣)이 쇠뫼등[현재의 여수시 율촌면 신산마을]으로 이거하면서부터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한림학파의 일가를 이루었다.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오흔인은 개성소윤을 지냈던 오성만(吳成萬)의 장자이다. 부인은 후에 정부인으로 추증된 충주지씨(忠州池氏)가 있으며, 오수명(吳受明)과 오보명(吳補明)의 두 아들을 두었다.
[활동사항]
오흔인은 고려 후기 개성에서 태어났으나 생몰 연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의하면 오흔인은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와 목은 이색(李穡)[1328~1396] 등 고려 후기 지조 높은 충신들과 종유(從遊)한 절인(絶人)이었으며,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벼슬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오흔인은 여수현령으로 있던 중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불복하고 조정에서 보낸 사자(使者)를 폐성불납(閉城不納)하였다. 이에 1397년(태조 5) 태조는 여수를 반역향으로 지목하고 여수현을 폐하여 순천부에 예속시켜 버렸다. 오흔인은 끝내 불사이군의 뜻을 굽히지 않은 채 굳게 닫힌 성 안에서 방치되었다가 순절하였다.
[묘소]
오흔인의 묘소는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오흔인은 세조 때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뒤늦게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찬(撰)한 묘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