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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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던 전래 지명. 여수시 고소동 지역으로 옛 고소장대 동쪽 골짜기의 이름이다. 시가지 형성 전에 동물의 사체를 버리면서 개장골이라 불렀다. 개장골이란 말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데 개나 짐승의 사체를 버리면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온다. 개의 송장을 버리는 골짜기라는 의미로 개장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라좌수영 시절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지금은 시가지가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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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전투함의 하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3척으로 추정되는데, 명칭은 본영거북선, 방답거북선, 순천거북선으로 모두 여수에서 만들어졌다. 제작 지역은 본영선소[중앙동]와 방답진선소[돌산읍], 그리고 순천부선소[시전동]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그림으로 전해지는 거북선의 종류는 세 가지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충무공전서』에 실린 통제영 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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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겸제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6칸 창고로,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재원의 마련 방법과 사용처가 기록되어 있다. 『호좌수영지』의 기록에 의하면, 겸제창(兼濟倉)에서는 매년 말에 쌀 20석씩을 군향미(軍餉米) 모중(耗中)에서 본창에 갈라 나눠주고 출사(出使)의 양료(粮料)에 보급한다. 감색(監色)은 재임 중에 겸정한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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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에 설치되었던 수군기지. 『문화유적총람』에는 1488년(성종 19)에 설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렵엔 이미 이곳에 진성이 축조되고 있었을 때이므로 성종조 설진설은 잘못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설진과 축성의 순서를 보면 고돌산진뿐만 아니라 어느 수군 기지든지 처음에는 진을 설치하고, 진을 설치할 때는 간단한 여사 정도만 만든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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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姑蘇洞)에 있는 사적지.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雉城) 위에 세운 포루의 일종으로서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동문(東門) 좌포루(左鋪樓)가 5칸으로서 1773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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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법정동. 조선시대에는 전라좌수영성의 장대가 있어서 유래된 장동과 지형이 평지라는 데서 유래된 평동 두 마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여수를 동서로 나누어 동정(東町)과 서정(西町)이라 하면서도 이 지역은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 왕의 연호를 따서 별도로 소화정(昭和町)이라 하였다. 소화정의 이름과 해방 후 이 지역에 여수군 청사를 비롯한 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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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연구 또는 개발되었거나 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총칭. 과학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으로 넓은 뜻으로는 학(學)을 의미하나 좁은 뜻으로는 자연 과학을 지칭한다. 그리고 기술은 과학의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여 자연의 사물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상호 밀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과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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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속하는 법정동. 전라좌수영 당시 동문 밖이 되므로 동문밖 또는 동문외라 하고, 또는 관아가 있으므로 아동(雅洞)이라 하였다. 1946년 동문밖을 동문동(東門洞)으로, 아동을 관동(館洞)으로 고쳤다가 1953년 행정구역 개편 시 주민들의 합의에 따라 동문동과 관동을 합하여 관문동(館門洞)이라 하였다. 본래 여수군 여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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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행위. 교육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사회 개조의 수단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은 내부의 자연적 성장의 힘과 외부 영향력과의 합력(合力)에 의하여 성립되는 인간 형성의 작용을 의미하며, 타고난 그대로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참되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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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말과 기억에 의존하여 전해 내려오는 민간 지식의 총칭. 구비전승은 크게 문학적 성격을 지닌 구비문학과 비문학적 성격의 말로 된 생활 기술 지식을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구비전승 하면 떠오르는 구비문학의 경우 전설·신화·민담 등 문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 설화와 노동요·만가·타령 등 노래의 형식을 빌린 민요, 그밖에 수수께끼·속담 등으로 나뉜다. 여수 지역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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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속하는 법정리. 돌산 지역은 조선수군진의 하나로 방답첨사진이 자리하였는데, 진영이 석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지금도 그 흔적을 마을 곳곳에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중종 때 쌓아진 성의 기록을 보면 주위가 2,182척(尺)(661m), 높이가 13척(3.9m)의 사각형 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오랜 역사를 안은 마을답게 땅이름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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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는 357.5㏊의 면적에 537세대 1,415명[남자 715, 여자 700]의 주민이 살고 있는 돌산읍에서 가장 큰 법정리 마을로 돌산읍사무소 소재지이다. 군내리라는 마을 이름은 1896년 돌산도를 중심으로 한 도서 지역이 돌산군이 되면서 ‘군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졌다. 돌산이 군이 되었던 것은 당시 완도의 고금도와 흥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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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법정동. 전라좌수영 시절 군자정(君子亭)이라는 활터가 있어 군자동(君子洞)이라 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향교가 있어 예동(禮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본래 여수군 여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동(樹洞)·정동(井洞)·예동(禮洞)·근동(芹洞)·내동(內洞)·재동(齋洞)·죽동(竹洞)·행동(杏洞)·지동(枳洞)·남동(南洞)·장동(莊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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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지낸 무신. 1891년 부호군으로 있다가 1894년(고종 31) 전라좌수영의 마지막 수군절도사로 부임했다. 이때 동학군들이 여수·순천·광양 등에 이르러 형세가 매우 위태로웠으나 선방하여 좌수영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관할 하에 있던 하동·광양·순천·보성·장흥·흥양을 평정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기적비(紀績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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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나대용은 전라좌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왜적 침입에 대비하여 병선 제작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종제인 나치용과 함께 고향인 순천에서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 지역으로 내려왔다. 나대용은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전라좌수영 수군의 전선을 건조하는 감조군관으로 임명을 받고 선소에서 전선을 제작하게 된다. 선소는 전라좌수영 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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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에 있던 수군기지. 1396년 진례만호진이 설립되어 28년간 계속되어 왔으나 1423년(세종 5) 1월 전라감사가 “도내 진례량의 병선을 내례량으로 옮겨 경상도 우수영[거제도]의 서편을 관장하는 남해도, 평산포만호진의 병선과 마주 대하여 봉화로 서로 연락하는 방어선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 세종이 이를 윤허함으로써 진례만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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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에 전해오는 전래 지명. 당머리는 남산동 남쪽 해안으로 예암산 자락이 닭머리 모양으로 뻗어 내린 지형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이곳에 영당이 있어 수산업을 주업으로 하던 어부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당굿이 자주 열렸으며, 당집머리가 줄어 당머리가 되었다는 유래도 전해온다. 같은 의미의 당머리 지명이 율촌면 여흥리, 화양면 나진리, 화양면 세포리에도 전해오며 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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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의 진남관 앞 비각 안에 있는 조선 후기 비석. 여수시에는 도치뿔샘[공화동에 있는 큰 샘]과 큰샘[군자동 남쪽에 있는 큰 샘]이라고 불리는 큰 샘 두 곳이 있다. 이 중 정확히 어느 샘을 파고 나서 대정서변립비(大井西邊立碑)를 세웠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까지 군자동 아래에 남아 있는 샘을 큰샘이라 부르며, 주변 지역을 큰샘골이라고 부르는 등의 정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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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1721년(경종 1) 절도사 박세정(朴世梃)이 창건하였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도무창은 13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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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전해오는 전래 지명. 독은 돌의 방언으로 독다리는 돌로 만든 다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여수에는 동문독다리와 서문독다리 두 곳이 알려져 온다. 동문독다리는 지방기념물인 여수청년회관 부근에 있던 돌다리로 지금은 골목길로 변하였다. 동문독다리는 좌수영의 동문이 있던 지금의 관문동 여수청년회관 부근이며 서문독다리는 이비당골이라는 골목길 입구로 전라좌수영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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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해안 방비를 담당한 관청.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는 방답진 설치 이후에 공공건물로 아사향청(衙舍鄕廳), 순교청(巡校廳), 장교청, 서기청, 형리청, 사령청, 취수방(吹手房) 등 관아가 있었던 곳이며, 그 중 하나가 군관청이다. 방답진은 전라좌수영 관하의 첨사진으로 1487년(성종 18)에 창설되어 1895년(고종 32)에 폐지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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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둔전리 봉화산에 있는 봉수 터. 봉수란 봉(峰)과 수(燧)로 급보를 전하던 고대의 통신 방법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불빛과 연기로 신호를 전달하던 것인데, 야간에는 횃불이 잘 보이지만 주간에는 잘 보이지 않아 대신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대략 10리마다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두었다. 돌산도 봉수는 서쪽으로는 백야곶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진례산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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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운동. 동학은 심화되고 있던 봉건 체제의 모순과 열강의 침략 위기 속에서 1860년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되었다. 동학은 인내천 사상을 내세웠으며, 유·불·선은 물론 민간 신앙과 천주교를 포용한 당시 사회사상의 합성체로 평민은 물론이고 천민에 이르기까지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동학의 교리에는 개벽과 평등의 반봉건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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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군신을 상징하는 군기인 둑[纛]에 지내던 제사. 둑제는 군신을 상징하는 깃발에 지내는 제사의식으로 고대부터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둑에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둑기의 모습이 확인되지만 둑제의 시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승리의 신인 치우의 머리를 형상화한 둑기는 소의 꼬리나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대조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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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조발리에 있는 섬. 옛 문헌에는 두음방도라고도 하였는데, 연못의 사투리인 둠벙이라는 여수 지방 사투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마을 형상이 큰 연못처럼 생겨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여겨지며 둠벙섬으로 불러졌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산하 수군이 고흥 방면으로 가면서 일시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라 하여 진칠 둔(屯)자와 군사 병(兵)자를 써서 둔병이라 부른다는 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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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 청년들이 조직하였던 사회 운동 단체. 3·1운동 때에 서울에서 유학하던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학생들은 여수향우회를 만들어 활약하였다. 3·1운동의 후유증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하고 피신한 여수향우회 소속 학생들은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여수 지역에 은신하고 있는 몇 사람들이 모여 서로 맞잡고 돕자는 뜻으로 맞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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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문관과 무관 혹은 이에 합당한 대접을 받은 인물. 흔히, 문무관인이라 할 때는 등과(登科)한 인물이거나 가자(加資), 증직(贈職), 수직(壽職)의 시혜를 받은 인물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여수 출신으로서 등과를 했거나 이에 합당한 대접을 받은 인물로는 다음과 같다.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누어지고, 문과는 다시 소과와 대과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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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평중(平仲), 호는 죽파(竹坡). 초기의 이름은 박자방(朴自芳)이었다. 밀양박씨 여수 입향조인 박진현(朴振賢)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무과에 올라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있을 때 박자방을 대동하고 화양에 입향하여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어렸을 때부터 장재(將材)로 소문난 박자방은 정유재란을 당하여 전라좌수영으로 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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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석축성. 방답진성은 돌산도의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앞바다는 요형(凹形)의 만을 이루고 있다. 그 앞에 다시 송도가 가로막고 있어 천연의 양항을 이루고 있다.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이면서 왜구 방비의 요충지이다. 돌산포만호진(고돌산진)은 내륙과 접근되어 있어 왜구의 방비를 최전방으로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돌산포만호진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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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방답진(防踏鎭) 군관청(軍官廳)은 1987년 9월 18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군내리는 방답진 설치 이후에 아사향청, 순교청(巡校廳), 장교청, 서기청, 형리청, 사령청, 취수방 등 관아가 있었던 곳이며, 이 가운데 하나가 군관청이다. 방답진은 전라좌수영 관할하의 첨사진으로 1523년(성종 18)에 창설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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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방답진(防踏鎭)은 1523년(중종 18)에 설치되어 임진왜란 때 최전방에서 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던 전라좌수영 휘하의 첨사진이었다. 1896년 돌산군 창설 때까지 374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에 조선 수군의 진이었다. 군내리에는 지금도 방답진 당시의 많은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서 나라를 구했던 선조들의 이야기와 생활상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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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년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설치한 수군 진(陣). 방답첨사진은 지금의 돌산읍 군내리에 있었던,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최일선 수군거진(水軍巨鎭)이었다. 원래 돌산은 고려시대까지는 돌산현으로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여수현과 함께 폐현시켜 순천부의 일개 면으로 귀속시켜 버렸다. 1523년(중종 18) 전라좌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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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만 앞 장군도와 돌산도를 잇는 수중 석축. 장군도는 여수시 중앙동 산1번지를 이루는 무인도로 섬의 주위가 600m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섬이다. 대나무가 많아 대섬[竹島]으로도 불린다고 알려졌으나 장군도에 대나무는 없다. 죽도는 대섬을 한자로 음차한 이름이다. 대나무가 많은 섬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나무의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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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백초마을에 전승되던 농악놀이. 백초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진중농악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장병들이 왜적을 맞아 싸우면서 포를 쏴 적을 무찔렀을 때 고시(鼓施)를 알리는 농악을 쳐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을 연상하게 하는 농악이다. 일반 농악은 오체질굿, 오방진굿, 짝바름굿, 십자행굿, 풍년굿 등으로 전개되지만 진중농악은 행군굿, 훈련굿, 진중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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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여수 진남관에 있는 조선 중기 전라좌수사 변국간의 선정비. 변국간 선정비는 임진왜란 4년 전인 1588년(선조 21)에 전라좌수영 백성들이 변국간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새로 만들어진 비좌와 장식이 없는 단순한 비갓으로 되어 있다. 비석에 "수사변공국간선정비만력십육년육월일(水使卞公國幹善政碑萬曆十六年六月日)"이라 쓰여 있다.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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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보군창(補軍倉)은 1673년(현종 14)에 절도사 원상(元相)이 창건하였고, 1767년(영조 43) 절도사 김종만(金鍾萬)이 중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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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법정동. 조선시대에는 전라좌수영의 무기를 제련하던 사철소(沙鐵所)가 있어 쇠철이라 하였고, 이후 구봉산(九鳳山)[388m] 아래 있다는 데서 봉산동이 유래되었다. 본래 여수군 여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서리와 국포리가 통합되어 봉산리가 되었다. 1931년 여수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여수읍 봉산리가 되었고, 1949년 여수읍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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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철 생산지. 전라좌수영 고지도에는 ‘사철(沙鐵)’이라는 표기가 있다. 또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제철지 봉산동 1568~1609년 임진왜란 때 사철이 생산되어 무기 제작에 사용, 영조 27년(1751)에 절도사 정익량이 사철소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산동 사철소는 전라좌수영 본영으로부터 해안쪽으로 약 2㎞ 떨어져 위치해 있다.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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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석가모니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불교는 흔히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다른 종교가 사랑·인(仁)·박애 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반면에, 불교는 자연과 우주의 보편 원리로서 개개의 존재에 내재하는 본성을 깨달아 실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교주는 석가모니이며, 깨달음을 위한 수행 방법을 체계화하여 정리한 불경이 있다. 신도로는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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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있었던 제철 제련소. 사철소는 전라좌수영 본영으로부터 해안 쪽으로 약 2㎞ 떨어진 현 여수시 봉산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제철소로 임진왜란 당시 무기 제조 및 병기 공급 창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철광석인 사철은 현재의 진성여자고등학교 아래인 서당산(書堂山)에서 산출하여 사철소로 옮겨와 제련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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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현(지금의 여수시)이 세 번 폐현되었다가 네 번째 복현(復縣)을 이룬 것. 1396년(태조 5)에 조정에서 새로운 왕조(王朝)의 건국에 관한 교지(敎旨)를 전국에 내렸는데, 당시 여수의 현령(縣令) 오흔인(吳欣仁)은 태조의 혁명을 단호히 반대하며 사신을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태조는 대노하여 여수의 폐현을 명하고 순천부에 예속시켰다. 순천에 예속된 여수 백성들은 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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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을 부르던 지명. 새철은 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에 전해 오는 전래지명으로, 사철소가 있어 사철(沙鐵)이라 부르게 된 것이 새철 또는 쇠철로 그 음이 변하여 전해진 것으로 본다. 사철소는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수군 무기를 제작하던 제련소이다. 사철소(沙鐵所)는 조선시대의 전라좌수영의 수군 무기를 제작하던 제련소이다. 봉산동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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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거문도의 세 개의 섬 중에 가장 큰 섬인 서도가 서쪽에 있어서 지금의 이름으로 되었다. 본래 전라좌수영에 딸린 거문도의 한 섬으로 1895년(고종 32)에 돌산군 삼산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촌을 서도리라 하여 여수(천)군에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 여천군·여천시·여수시의 통합으로 새로운 여수시 삼산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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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7년(인조 25) 작성된 전라좌수영 관할 선소 수군 무기고 현황이 담긴 고문헌. 『선소수군기반열책(船所水軍器班閱冊)』은 1647년(인조 25) 5월 전라좌수영 관할 내의 순천도호부[현 여수시 시전동] 소속 선소 수군들 중 무기고를 담당하던 군기관들끼리 무기류를 인수·인계하면서 그 결과를 기록하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게 결재를 받은 문서이다. 이임 군기관은 서의득·정감손이고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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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있던 옛 지명. 여수시 관문동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으로 지금의 여수여자중학교와 여수여자고등학교 부근을 이르는 이름이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이 훈련하던 활터의 과녁이 있었던 연유로 활을 쏜다 하여 ‘쏠탕’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고, ‘솔탕’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사례로, 방답진이 있던 돌산읍 군내리 ‘솔통’도 활터의 과녁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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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에 전해지는 이순신의 순절을 암시하는 풀무골에 관한 이야기. 『전라좌수영고지도(全羅左水營古地圖)』에는 ‘사철(沙鐵)’로 표기된 지명이 있다. 『문화유적총람』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에서 임진왜란 때 사철로 무기를 만들었으며, 1752년(영조 27)에는 절도사 정익량(鄭益良)이 봉산동에 사철고(沙鐵庫)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여수시 봉산동 일대는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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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섬과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자랑하고 있는 여수시는 다양한 볼거리는 물론 역사와 문화적인 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비취빛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317개의 섬 하나하나가 신비로울 만큼 아름답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등 두 개의 해상국립공원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여수항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는 것은 상업항과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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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서 수륙의 일체 고혼을 천혼하는 공양의례. 수륙재는 정치적인 격변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무하기 위해 생성된 불교의례이다. 여기에는 내생(來生)을 받지 못하고 떠도는 수많은 원혼을 집단적으로 해원시키며, 동시에 신도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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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전해 내려오는 전래 지명. 여수시 동산동과 덕충동 사이의 산등성이 이름으로, 생긴 모양이 수박처럼 둥글게 생겨서 수박등이라 하였다. 1786년에 만들어진 전라좌수영 전도에도 표기되어 있는 지명이다. 여수시 덕충동 종고산 동쪽 산등성이로 옛날에는 여수 충민사 입구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비탈이 심한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충민로를 끼고 주택지가 되었다. 여수시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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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선창에 있었던 돌로 쌓아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만(灣)처럼 굽어 있는 구조물의 터. 수장은 1592년 조선 후기 숙종 때 수사 윤하가 여수항의 큰 물결을 막을 목적으로 쌓은 구조물이다. 해안 가까이의 바닷속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난중일기』 임진년 2월 1일에 “出船滄 點擇可用板子 時水塲內鯈魚雲集[선창에 나가서 쓸 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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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숙박 서비스 제공 시설. 숙박 시설은 일반적으로 호텔·여관·여인숙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이해된다. 즉 수면을 위한 기본 시설뿐만 아니라 세면이나 휴식 공간은 물론 식사 기능까지 겸하는 숙식을 여행객들에게 제공하는 형태의 시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현대 사회의 경제 발전과 관광 산업의 발전 추세를 고려할 때 이전처럼 말 그대로의 숙박 범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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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돌산군이 설치되고 1897년 5월 여수군이 설치되었는데, 이 지역은 모두 순천부에 속해 있었다. 순천부에 속해 있을 당시 여수 방면의 도로는 순천부에서 여수 방향 16㎞ 지점에 성생원[율촌면 소재], 24㎞ 지점에 무상원[쌍봉역], 32㎞ 지점에 내례원[국동 지역]이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3개의 역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수에는 세 갈래의 간선도로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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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雁島)는 여수시에서 남쪽으로 34㎞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북쪽에 금오도가 있고 남쪽에 연도가 있다. 면적은 3.96㎢, 해안선 길이는 29㎞이며, 섬 중앙에 솟은 상산(上山)[207m)]이 가장 높다. 상산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는데, 왜구의 침략과 상황을 알리던 요망소로 추정되며 금오도의 심포마을 요망소와 서로 연락을 취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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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열 곳과 가장 맛있는 음식 열 가지. 여수 10경, 여수 10미(麗水 十景, 麗水 十味)는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직접 선정하였다. 여수 10경에는 오동도, 거문도와 백도, 금오도 비렁길, 향일암, 여수세계박람회장, 진남관, 여수 밤바다와 산단[여수국가산업단지] 야경, 영취산 진달래, 여수해상케이블카, 이순신대교가 있다. 여수 10미는 돌산갓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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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문수동·미평동·둔덕동 고락산에 있는 백제시대 석축 산성. 여수 고락산성에 대해서는 관련 문헌이 없어 연혁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락산성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의 본영을 방비하기 위해 고락산의 양 봉우리에 쌓은 성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백제시대의 기와로 추정되는 와편(瓦片)들이 다량으로 수습되고, 축성 기법으로 볼 때 600년을 전후한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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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지역 청년운동의 본거지. 여수시 관문동 여수경찰서와 여수엑스포역을 잇는 대로변 우리은행 여수지점(구, 한일은행) 뒤에 있다. 은행 뒤쪽 소로를 끼고 자리를 잡고 있다. 전라좌수영성에 ‘덕지’ 혹은 ‘못물동’이라고 부르는 400평~500평 가량의 연못이 있었다. 1930년 이 연못을 메우고 좌수영 밑에 있던 좌청[일명 취방청-당시 우체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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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에 있는 돌로 만든 장승. 봉산동에는 사철소라 부르는 곳이 있었는데, 지금의 봉강동 의관산에서 캐 온 철석을 녹여 충무공 휘하의 전라좌수영 수군이 사용하는 활촉, 군검과 장못 따위 군사 무기를 만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연고로 이곳은 외부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통제 구역이었다. 그래서 이 경계 지역에 수문장 격인 벅수를 세워 외부인의 출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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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조선시대 수군 전선의 정박처 및 수군의 일차적인 제반 업무를 수행하는 항만시설을 포함한 일정한 군사적 공간. 여수 선소유적이 위치하던 곳의 포구는 예로부터 장생포라고 하였다. 장생포는 고려 공민왕 초 왜구가 장생포로 침입해 왔을 때 유탁이라는 장수가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적을 물리쳤다. 이것 때문에 병사와 주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며 부른 노래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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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던 악공청과 관련된 자료 일괄. 여수에는 악공청(樂工廳)이라 불리는 음악기관이 있었다. 악공이란 관아에서 음악을 담당하던 음악인을 지칭하며, 원래 악공청이 있는 곳은 여수 진남관의 왼쪽(동쪽) 뒤쪽이다. 이런 입지 조건으로 볼 때에 악공청이 과거 관아와 관련 있던 기관임을 알 수 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를 보면, 취군(吹軍)이 131명, 기생(妓生)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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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돌로 만든 장승. 벅수는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몸통에 이름을 새긴 장승이다. 장승의 기능은 마을 수호신이나 이정표, 가람 수호신, 벽사(辟邪) 등 다양하다. 여수 지역에 분포된 벅수에는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라는 명문이 있어 지역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한(漢)나라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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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의 객사. 1599년(선조 32)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건립하였다. 1716년(숙종 42) 절도사 이여옥 때 큰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718년(숙종 44) 이제면 수사가 중창하였다. 1911년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로 사용하였고, 2001년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15칸[54.5m],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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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매년 5월 초 이순신의 구국정신을 선양하고 호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거행되는 축제. 임진왜란 당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오관오포(五官五浦) 영민들의 넋을 위로하며 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향토의식을 함양하며 향토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1967년 5월 5일 제1회 전라좌수영 진남제전 행사가 개최되었다. 1975년 5월 5일 제9회 제전행사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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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구역. 고려시대인 1350년(충정왕 2)부터 있던 여수현을 1396년(태조 5)에 태조의 정치 보복으로 폐현시켜 순천부에 예속한 후 500년에 걸쳐 순천부와 전라좌수영 두 관청의 부역과 조세를 이중으로 부담하는 폐단을 겪었다. 이후 복현 운동의 결과로 1897년(고종 34) 5월 16일 여수군(麗水郡)을 설군하라는 칙령(勅令)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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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여수군청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여수군청은 간숙당이라는 건물로, 1479년(성종 10)에 전라좌수영성과 같이 지어졌다. 역대 수군절도사들의 시무청인 운주헌으로 불려오다가, 1897년 여수군이 설치되면서 여수군청으로 사용되어온 건물이었다. 위치는 전라좌수영 역내 지금의 군자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2.314m²의 부지에 결승당과 완경루 등의 두 부속 건물이 있었다. 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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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대포리 국도 제17호선 여수-순천 간 자동차 전용 도로 구간에 설치된 여수 상징문. 여수문의 디자인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좌수영과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으로도 사용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받아 우리나라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을 모방하여 한옥 형태로 디자인하였으며, 현판은 한국예술총연합회 여수지회의 추천을 받아 여수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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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여수현을 다시 설치하기 위하여 벌인 동맹 운동. 1896년 2월 완도나 돌산 같은 섬마저 군이 되었으나 여수 만은 열심히 복현 운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설군(設郡) 문제가 실패하여 여전히 순천부 관할에 묶이게 되었다. 이에 형편에 맞지 않은 조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1896년 3월 18명이 고장의 비원을 풀기 위해 동맹하였다. 전라남도 여수현에서 발생한 삼복삼파 이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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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동남부 지역에 있는 행정구역. 여수(麗水)라는 명칭은 고려 전기인 940년(태조 23) 행정구역 개편 때 해읍현(海邑縣)을 여수현(麗水縣)으로 변경하면서 처음 사용하게 되었는데, 3면이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인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 54개국 중 하나인 원지국(爰池國)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538년(성왕 16) 구지하성이 관할하는 삽평군(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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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흥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1196년(명종 26) 지눌(知訥)이 창건하였으며,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어 흥국사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승수군(義僧水軍)의 주진사로 쓰이는 등 호국불교의 성지로 불린다.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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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과 중앙동에 있는 항구. 여수항은 부산항에 이은 우리나라 제2의 수산항이다. 여수시 남동해안의 돌출부를 이루는 자산공원을 중심으로, 북쪽의 수정동 일대에는 북항이라고 하는 여수항 신항이 있으며, 남서쪽의 교동과 중앙동 일대에는 남항이라고 하는 여수항 구항이 있으며,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장에 편입되면서 폐쇄된 여수신항을 대체할 여수신북항이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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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법정동. 연등동을 관통하고 있는 옛 도로가 왼쪽으로 구부러져 ‘잉구부’라고 한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여수 지역에서는 ‘왼’을 ‘잉’으로 발음하는데, 이를 한자 표기로 바꾸면서 ‘인’을 음이 비슷한 ‘연’으로, 구부는 뜻풀이를 하여 고개란 뜻의 ‘등(嶝)’으로 표기하게 되어 ‘잉구부’가 ‘연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등(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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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던 행정구역. 전라좌수영이 관할하던 행정구역인 오관오포는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낙안군(樂安郡)·보성군(寶城郡)·광양현(光陽縣)·흥양현(興陽縣)의 다섯 군현(郡縣)과 방답진(防踏鎭)·사도진(蛇渡鎭)·여도진(呂島鎭)·발포진(鉢浦鎭)·녹도진(鹿島鎭)의 다섯 진포(鎭浦)를 말한다. 전라좌수영 관할 오관오포 가운데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흥양현 경내에 일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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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에 있는 조선 전기에 관의 주도로 고사를 지내던 단. 여제단이란 주인도 없고 사당도 없는 귀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관에서 만들어놓은 단을 말한다. 흔히 미혼 남녀의 귀신이나 사손(嗣孫)이 없는 무주신들이 산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여겨졌는데, 이들을 달래고 위로하여 마을의 역질이나 재난을 막아내기 위해 마련되었다. 여제단은 보통 고을 관부의 북쪽에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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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방답진은 전라좌수영의 전초 기지로서 왜구가 다니는 길목이며 바다 방비의 요충지이다. 1522년(중종 17)에 축성을 시작하였다. 성은 석성으로서 길이가 694보(1587.525m)이고, 높이는 19척(6.27m)이며, 성의 마디인 여장은 205개소가 있다. 성문은 남문인 영남루를 비롯해 서문, 동문 등 3개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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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념 체계. 유교의 교리는 공자의 인의(仁義) 정신으로 윤리 도덕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대도(大道)를 실천하고 보급하여 도의사회(道義社會)를 건설하자는 유학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유교는 현실성을 중시하고 현실 문제를 개혁하려는 데 중점을 둔 교학 사상으로 내세나 이면 세계, 사후 세계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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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외침으로 국가가 위태로울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싸웠던 군대 또는 그 군대의 구성원. 한국은 지정학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유사 이래 외세의 침략을 특히 많이 받아 멀리는 고구려민과 백제민의 국가 부흥을 위한 의병 투쟁으로부터 가까이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의 항일 의병 투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병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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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1910년을 전후로 펼쳐졌던 항일 의병운동. 한반도 남해안의 중심 항구인 여수시는 지정학적 이유로 일본의 침략을 많이 받아 왔다. 삼국 시대부터 끊임없이 한반도의 남해안을 침략해 노략질을 일삼아 온 왜구는 고려 후기 여수 지역 장생포에서 유탁(柳濯) 장군에게 격퇴당하였다. 왜구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침략을 감행하였는데, 이대원(李大源) 장군의 손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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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이도빈의 선정비. 이도빈은 1644년(인조 22) 여수 진남관을 개축하였던 인물로, 『하멜표류기』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이도빈이 전라좌수영의 수사로 재임하면서 베풀었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좌수영의 백성들이 세웠다. 방형의 대좌 위에 장방형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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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남도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활동한 무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의숙(儀叔). 충무공 이순신의 5세손이다. 죽산안씨와 달성서씨를 아내로 맞아 각각 이한필(李漢弼)·이한익(李漢翊) 두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 이홍저(李弘著)는 상주진영장겸토포사(尙州鎭營將兼討捕使)를 지냈고 호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할아버지 이광윤(李光胤)은 현릉참봉을 지냈고 사헌부대사헌에 증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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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이수광은 태종의 7세손으로 왕손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이희검(李希儉)이다.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조선 전기 청백리 하정(夏亭) 유관(柳寬)의 5세손이다. 이수광은 1563년(명종 18) 2월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당대의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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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전투를 지휘한 무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1) 서울 건천동에서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화를 당한 후로 가세가 기울어 충청남도 아산 외가로 옮겨 살았다. 1576년(선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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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서은부 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여수시 입향조. 이천서씨의 시조는 기자(箕子)의 40세손 기준의 후손 서신일(徐神逸)이라 한다. 기준(箕準)은 위만을 피하여 이천에 있는 서아성(徐阿城)에 살았다 하여 그 후손이 성을 서씨라 하고 본관을 이천(利川)이라 하였다. 이천서씨 여수 입향조는 원숙공(元肅公) 서눌(徐訥) 파조의 17세손 서은부(徐殷富)이다. 서은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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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이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어머니와 가족을 피난시킨 거처.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은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 부인이 임진왜란 때 5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는 노모에 관한 기록이 88일 분이나 있어 그 효성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인 갑오년 정월 노모와 설을 같이 지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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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의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고, 1896년 도서 지방에 돌산군이 신설되고, 1897년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됨으로써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되어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였다. 후에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분리되는 등 7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면 돌산군이 폐지되었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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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선조 때 조정 내부는 대체로 당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이(李珥)가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정에서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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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서 전해지는 옛 지명. 잉구부는 연등동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의 옛 이름이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오림동부터 이어진 도로는 반달 모양으로 크게 휘어져 있다.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하여 왼구부라고 하였는데, 여수 지방에서는 ‘왼’이란 뜻은 ‘인’으로 발음하여 왼구부를 ‘잉(인)구부’로 하였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인’을 음이 비슷한 ‘연’으로, ‘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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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 터미널 옆 야트막한 산을 자산(資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았다고 해서 자산산성이라고 한다. 자산산성을 척산산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산의 자를 길이를 재는 단위인 자[척]로 착각 한 것에서 온 것이다. 자산의 ‘자’는 성의 옛 말로 자산은 성이 있는 산이라는 우리말이다. 성(城)의 우리말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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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수 지역에 설치한 전라좌도 해안 경비를 담당했던 수영(水營).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1479년(성종 10) 정월에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이 신설되었다. 전라좌수영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내례포(內禮浦)로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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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일대에서 이순신 장군이 1592년 24척의 판옥선을 몰고 옥포 앞바다로 출정하는 모습을 재현한 행사.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수영 본영 좌수사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순신 장군이 돌격선인 거북선을 건조(建造)하고, 일본의 침입을 대비하는 데 주력(主力)한 지역이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던 여수 지역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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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고소동·동문동에 있는 조선 전기 전라좌수영 성지. 1479년(성종 10) 전라좌수영이 창설됨에 따라 전라좌수영성 축조와 함께 관내 청사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전라좌수영성은 창설 당시에는 둘레가 1.7㎞나 되는 성터로서 여수 진남관 외 78개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기록에 남아 있는 전라좌수영성 내 청사(廳舍) 34개 동은 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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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전해 내려오는 전란에 관한 이야기. 여수 지역은 예부터 지리적 조건 때문에 왜구의 침략을 자주 받아 왔다. 그래서 고려 후기에는 수군 기지로서 진례만호, 내례만호를 두었으며, 조선 전기 1479년(성종 10)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여 1895년(고종 32)에 혁파되기까지 417년 동안 남해 지역의 방어를 위한 조선 해군의 주요 진지로서 임무를 다해 온 곳이다.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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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1543년(중종 38) 해남에서 증공조판서 정응정(鄭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경서(經書)를 가까이하였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웅천현감(熊川縣監)·제주판관 등을 지내면서 민의의 뜻은 따랐으나 부당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1591년(선조 24) 제주목사와의 불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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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조량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10칸 창고로, 마료(馬料)와 각종 하인마(下人馬)의 공궤(供饋), 고자사령료(庫子使令料), 동서통장료(東西統長料) 등의 지급 등을 맡았다. 『호좌수영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량창(助粮倉)에 마료조(馬料租) 50석은 동서토민(東西土民)이 연례 납부하여 이것으로 본부 하인 말을 공궤(供饋)하고 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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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1392년 조선 개국시 여수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신왕조에 불복하였다 하여 1396년(태조 5)에 여수현과 돌산현이 폐지되고 순천도호부에 속한 여수면이 되었다. 소라포부곡은 소라포면, 율촌부곡은 율촌면이 되었으며 삼일포향은 삼일포면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돌산현은 여수면으로 흡수되고, 인근 섬들은 낙안, 광양, 흥양[현 고흥]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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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답진을 설치하게 된 배경에는 왜구가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왜구가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을 주요 노략질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왜구에 대한 방어 대책은 개경이나 한양의 길목인 서해안과 남해 서부 해안에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기틀이 정비되는 세종에서 성종 때를 기점으로 수군 기지가 전진 배치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왜구의 침략이 남해안을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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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일원에 조성된 도시자연공원. 종고산(鍾鼓山)[220m]은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서 동산동, 연등동, 덕충동에 걸쳐 있는 산이며, 옛날부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산이 종처럼 울어서 종고산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전라좌수영에 봉수로 신호를 전하던 북봉연대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종고공원은 부지 면적 528,060㎡로 조성된 공원이며, 시내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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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동산동·군자동·충무동에 걸쳐 있는 산. 임진왜란 때 산이 스스로 울어 국난을 알려주었다 하여 이순신 장군이 종고산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정상부는 안부가 발달한 완경사 지역이나, 산 전체는 사방으로 급사면을 이루고 있어 크고 작은 하천의 발달이 없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화성암인 화산암류로 이루어져 있으며, 토양은 풍화와 침식으로 두터운 유기질층이 발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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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종화동에 있던 포구. 핸드릭 하멜이 전라좌수영을 나와 조선을 탈출하고자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향하는 배를 탄 곳이 종포 해변으로 알려졌으며, 일제강점기에 집필된 이광수의 『충무공전서』에선 종포를 새복개로 기술하였다. 종포는 조선시대에 현재의 종화동에 있던 포구를 이르는 지명이다. 종고산(鐘鼓山) 밑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포구라 하여 종개 또는 종포라 하였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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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청 건물.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좌헐소는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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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주사창은 8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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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교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자 법정동.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이 정박하던 항구가 있었던 곳으로 내항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 위해 해변의 바닷물 속에 담장인 수장이 있어서 수장끝이라고 불렸던 지역이다. 수장동이란 이름과 좌수영성의 남문 장대가 있었던 곳이라서 남문밖, 구장대, 중장동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러오던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이름은 구 여수시의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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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진남제 보존을 위해 만든 문화 예술 단체. 진남제는 여수반도 지역의 전통문화축제로서 임진왜란 시 전라좌수영 영민들의 호국의 넋을 기리고 당시의 전통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이순신의 첫 출전일을 기하여 1967년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1975년부터는 진남제전위원회에 의해 개최되었다. 전라좌수영의 호국 문화를 재현하여 자주 정신을 함양시키고 주민의 참여를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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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종화동에 축조한 쇠사슬로 만든 방비시설. 철쇄방비시설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다가올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구축한 방비시설 중 하나이다. 즉,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만든 방비시설로서 왜구가 야간에 좁은 수로를 지날 때 쇠사슬에 걸려 피해를 입도록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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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인간의 의사·지식·감정 또는 각종 자료를 포함한 정보를 공간적으로 주고받는 작용이나 현상 또는 그 수단이나 기술의 총칭. 넓은 뜻으로는 통신은 인체나 재화(財貨)의 위치적 또는 공간적 이동을 의미하는 운수(transportation)에 대응해서, 서신을 대상으로 하는 우편, 전류나 전파를 매체로 하는 전기 통신, 공간과 수중을 통한 음향 통신, 빛·연기·수기(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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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포량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3칸 창고로, 고자(庫子), 사령(使令), 포군(砲軍), 포수(砲手)에 대한 부료(付料)와 각종 피물의 첨가(添價) 등을 관리하였다. 포량창(咆粮倉)에서는 돈 1,700냥을 생식(生殖)하여 부료(付料) 및 피물(皮物) 첨가로 하고 색리(色吏)를 회계색으로 겸정하고 요조(料租) 1석, 고자(庫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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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형과 지명에 대한 풍수 이야기. 남북국시대 도선(道詵)[827~898]은 지세의 변화와 풍수의 조화가 인간의 생사까지 결정한다는 풍수지리설을 확립하였다. 그 후 풍수지리설은 우리 민족 생활 저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왔다. 특히, 현재까지 지명과 관련하여 구비 전승되는 많은 이야기가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마을 이름은 일정한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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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종고산과 한산도대첩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 한산섬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및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왜수군의 주력 부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한산도대첩은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부른다. 한산도대첩은 왜수군의 주력을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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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선박은 민가의 어선뿐만 아니라 전함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예부터 여수가 어항이면서 조선 초기에 설진된 진례만호진·돌산포만호진·내례만호진, 성종 때 설진된 전라좌수영, 중종 때 설진된 방답첨사진의 관방이 있었고, 여수 근해에 풍부한 어장과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수에서 본격적으로 여객선이 운행된 것은 1950년대부터이며,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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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1664년(현종 5)에 세워진 건물로 수용군에게서 수취한 액수와 사용처를 적어 놓았다. 해현창은 17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전라좌수영 남북의 동선 동측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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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조선을 서양에 소개한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1630~1692]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방에 소개한 인물로 네덜란드 호르큼 사람이다. 17세기 전반에 네덜란드는 열대 농작물과 동남아산 향료, 차, 칠기, 비단, 도자기, 면직물을 거래하려고, 인도나 일본, 대만 등지에 거래처를 둔 동인도회사(V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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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국가의 영역을 행정상으로 나눈 단위.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적 관할에서 행정의 편의, 재원 배분 등이 원활히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 적정 규모의 행정 구역을 설정하게 된다. 여수시는 1998년 4월 1일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주민 발의에 의하여 전국 최초로 도·농 통합을 이루어 명실 공히 전라남도 제1의 도시가 되었다. 여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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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에 있는 향토 민속 예술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문화단체. 향토민속문화보존회는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향토 민속 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하며 전승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설립자인 정홍수 초대 회장이 1960년부터 약 30년 간 민속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향토문화예술의 조사·발굴 및 보존에 전력하다가, 1992년 2월 24일 사단법인 향토민속문화보존회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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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뭐니뭐니해도 전라좌수영과 당시 전라좌수사로 있던 충무공 이순신의 공이 크다.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1479년(성종 10) 정월에 신설한 군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접촉이 심했던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좌·우 양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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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제반 사항을 수록한 영지(營誌). 앞에는 성내 영아(營衙)를 비롯한 각종 건물과 수영 주변의 산수를 상세하게 그린 채색 지도 1장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책의 내용 중에 나오는 건물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은 내용상 1847년(헌종 13)의 기록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호좌수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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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횡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군관·순천부사·방답첨사 등이 남긴 각석문. 횡간도 놀이청 각석문이 위치한 곳은 계단식으로 된 50평 정도의 암반을 이용하여 건너편 돌산읍 금성리에 있는 해안굴을 과녁 삼아 활을 쏘는 지방관원들의 연마장으로 전해오고 있다. 또한 고관들의 놀이터 역할도 겸했다고 하여 지방민들은 놀이청으로 부르고 있다. 횡간도 놀이청 각석문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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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공북루 편액. 사찰 배치 구조상 공북루가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공북루는 성의 북쪽 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북쪽의 성문은 북쪽에 임금이 있다 하여 공북이라 했다. 때문에 흥국사도 승병이 있었으므로 성문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승병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성문이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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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 있는 조선 말기의 완문(포고령). 목판에 음각을 했으며 테를 두른 편액이다.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의승수군과 전라좌수영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좌수사 이봉호가 갈등 관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일종의 법령을 발표하여 시행한 포고령으로, 흥국사에서 이를 편액으로 만들어 효시하였다. 포고령의 내용은 네 가지인데, 첫번째는 세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