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좌수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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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있던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에서 간행한 지리서. 『신호좌수영지(新湖左水營誌)』는 지리지의 작성과 별도로 표제 안쪽에 쓰여진 글귀를 통해 간행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지리지의 표제 안쪽에 “1815년(순조 15) 을해년에 읍지를 분장하였고, 70여 년이 지나 책이 손상되어 1884년(고종 21) 갑신년에 다시 개장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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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발간된 여수 지역의 향토 관련 서적. 근세 이전에 발간된 여수 관련 향토지는 『호좌수영지』, 『여수지』 등인데 『여수향토사』는 광복 이후에 간행된 여수 관련 최초의 향토지이다. 1952년 당시 여수 교육청 김낙원(金洛原) 장학사가 신구지(新舊誌)를 참작하여 당시 시교육청 및 협찬 회원의 도움을 받아 여수일보사에서 간행했다. 국판 활자본이며, 종서(縱書)했다. 구성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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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겸제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6칸 창고로,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재원의 마련 방법과 사용처가 기록되어 있다. 『호좌수영지』의 기록에 의하면, 겸제창(兼濟倉)에서는 매년 말에 쌀 20석씩을 군향미(軍餉米) 모중(耗中)에서 본창에 갈라 나눠주고 출사(出使)의 양료(粮料)에 보급한다. 감색(監色)은 재임 중에 겸정한 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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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姑蘇洞)에 있는 사적지.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雉城) 위에 세운 포루의 일종으로서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동문(東門) 좌포루(左鋪樓)가 5칸으로서 1773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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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팽님[1929년생] 할머니는 서도리마을에 사는 해녀이다. 올해 나이 80세로 서도리의 건너편인 동도에서 태어나 인물 좋고 힘 좋은 남편을 만나 서도리에서 살아왔다. 아들 딸 7남매를 둔 김 할머니가 39세 때 남편은 복어를 잘못 먹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모두가 그만그만하던 7남매를 키우는 일은 할머니의 몫으로 남아, 해녀 일을 통해서 홀로 가르치고 키워서 결혼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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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에 있던 수군기지. 1396년 진례만호진이 설립되어 28년간 계속되어 왔으나 1423년(세종 5) 1월 전라감사가 “도내 진례량의 병선을 내례량으로 옮겨 경상도 우수영[거제도]의 서편을 관장하는 남해도, 평산포만호진의 병선과 마주 대하여 봉화로 서로 연락하는 방어선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 세종이 이를 윤허함으로써 진례만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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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있던 연못. 「영성도(營城圖)」에는 동문과 동문(東門) 좌포루(左鋪樓) 사이에 연못과 성곽 아래로 수구(水構)를 내어 천수(川水)로 흘러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물길은 성곽을 따라 판 해자(垓字)와도 연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의 기록에 의하면 1773년 3월 김영수가 물이 솟을 만한 곳을 가려 민가를 헐어서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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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1721년(경종 1) 절도사 박세정(朴世梃)이 창건하였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도무창은 13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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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석축성. 방답진성은 돌산도의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앞바다는 요형(凹形)의 만을 이루고 있다. 그 앞에 다시 송도가 가로막고 있어 천연의 양항을 이루고 있다.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이면서 왜구 방비의 요충지이다. 돌산포만호진(고돌산진)은 내륙과 접근되어 있어 왜구의 방비를 최전방으로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돌산포만호진을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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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만 앞 장군도와 돌산도를 잇는 수중 석축. 장군도는 여수시 중앙동 산1번지를 이루는 무인도로 섬의 주위가 600m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섬이다. 대나무가 많아 대섬[竹島]으로도 불린다고 알려졌으나 장군도에 대나무는 없다. 죽도는 대섬을 한자로 음차한 이름이다. 대나무가 많은 섬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나무의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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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있었던 제철 제련소. 사철소는 전라좌수영 본영으로부터 해안 쪽으로 약 2㎞ 떨어진 현 여수시 봉산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제철소로 임진왜란 당시 무기 제조 및 병기 공급 창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철광석인 사철은 현재의 진성여자고등학교 아래인 서당산(書堂山)에서 산출하여 사철소로 옮겨와 제련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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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선창에 있었던 돌로 쌓아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만(灣)처럼 굽어 있는 구조물의 터. 수장은 1592년 조선 후기 숙종 때 수사 윤하가 여수항의 큰 물결을 막을 목적으로 쌓은 구조물이다. 해안 가까이의 바닷속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난중일기』 임진년 2월 1일에 “出船滄 點擇可用板子 時水塲內鯈魚雲集[선창에 나가서 쓸 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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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매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나 주장을 알려 여론을 형성하거나 인쇄물을 제작·복제하여 판매 또는 배포하는 일의 총칭. 일반적으로 언론은 담화·토론·연설·연극·방송·음악·영화 등 구두(口頭)를 통한 사상 발표를 말하며, 출판은 문서·서적·도화·사진·신문·잡지·조각 등 문자 및 상형(象形)에 의한 사상 발표를 의미한다. 그러나 두 용어 모두 개인이나 집단의 의견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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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던 악공청과 관련된 자료 일괄. 여수에는 악공청(樂工廳)이라 불리는 음악기관이 있었다. 악공이란 관아에서 음악을 담당하던 음악인을 지칭하며, 원래 악공청이 있는 곳은 여수 진남관의 왼쪽(동쪽) 뒤쪽이다. 이런 입지 조건으로 볼 때에 악공청이 과거 관아와 관련 있던 기관임을 알 수 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를 보면, 취군(吹軍)이 131명, 기생(妓生)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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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적비. 1779년(정조 3) 지방의 군사들과 의승(義僧)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호남좌수사로 부임한 김영수(金永綬)가 좌수영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보강하고 군사를 정비하였다. 또한 군기, 잡물 등을 마련하고 월과미(月課米) 및 정조(正租) 등을 마련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신은 방형의 머릿돌을 갖추고 있다. 높이는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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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외침으로 국가가 위태로울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싸웠던 군대 또는 그 군대의 구성원. 한국은 지정학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유사 이래 외세의 침략을 특히 많이 받아 멀리는 고구려민과 백제민의 국가 부흥을 위한 의병 투쟁으로부터 가까이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의 항일 의병 투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병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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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대비하기도 하였으나, 선조 때 조정 내부는 대체로 당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이(李珥)가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정에서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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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고소동·동문동에 있는 조선 전기 전라좌수영 성지. 1479년(성종 10) 전라좌수영이 창설됨에 따라 전라좌수영성 축조와 함께 관내 청사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전라좌수영성은 창설 당시에는 둘레가 1.7㎞나 되는 성터로서 여수 진남관 외 78개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기록에 남아 있는 전라좌수영성 내 청사(廳舍) 34개 동은 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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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는 옛날부터 전복이 유명했다. 여수의 역사책인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의하면 섬에다가 잠수군(潛水軍)을 두고 전복을 잡아 말려서 진상하고 생전복은 역마를 통해 서울로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안도의 전복은 육상 수조나 해상 가두리에서 양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의 종패를 바다에 뿌려 해저에서 자연 상태 그대로 키운 것이다. 전복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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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창고. 조량창은 전라좌수영 내에 설치된 10칸 창고로, 마료(馬料)와 각종 하인마(下人馬)의 공궤(供饋), 고자사령료(庫子使令料), 동서통장료(東西統長料) 등의 지급 등을 맡았다. 『호좌수영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량창(助粮倉)에 마료조(馬料租) 50석은 동서토민(東西土民)이 연례 납부하여 이것으로 본부 하인 말을 공궤(供饋)하고 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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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청 건물.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좌헐소는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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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 내에 있던 공창.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따르면 주사창은 8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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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운용되었던 널빤지로 지붕을 만든 군선(軍船). 조선 전기의 군선은 조운(漕運)을 겸하는 맹선(猛船)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군용으로서 제구실을 못했다. 특히 16세기에는 삼포왜란·사량왜변·을묘왜변 등 변란이 속출했는데, 맹선으로 왜구를 제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군선 개발에 부심한 결과, 1555년(명종 10)에 새로 개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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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제반 사항을 수록한 영지(營誌). 앞에는 성내 영아(營衙)를 비롯한 각종 건물과 수영 주변의 산수를 상세하게 그린 채색 지도 1장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책의 내용 중에 나오는 건물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은 내용상 1847년(헌종 13)의 기록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호좌수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