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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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1일부터 1919년 4월 11일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1919년 서울에서 비롯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영주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영주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1919년 4월 11일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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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영주 지역의 역사. 소백산 아래 교통의 요충지였던 영주는 고대부터 삼국의 쟁탈지가 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석사(浮石寺)가 창건되어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설립되는 등 유교문화를 꽃피워 나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기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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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에 있는 영주 지역 관할 행정기관. 영주시청(榮州市廳)은 지방자치단체인 영주시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다. 영주시청은 중앙 정부 및 광역자치단체[경상북도]로부터 위임받은 업무와 영주 지역 고유의 행정 및 민원 업무 수행을 위해 설립하였다. 영주시청은 조선총독부가 1914년 3월 1일 「도의위치관할구역및부군의명칭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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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80년까지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행정구역. 영주군(榮州郡)은 1914년부터 1980년까지 지금 영주시 일대에 두어졌던 지방행정구역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하여,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한 방대한 국토 자료를 바탕으로 1914년 3월 1일 전국을 13도 12부 220군으로 개편하였다. 특히 기존 군의 경우 면적·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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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에 속하는 법정동. 영주동(榮州洞)은 영주 시내 중심에 있으며, 행정동은 영주1동과 영주2동에 속한다. 자연마을로는 신사골, 숫골, 관사골, 두서(斗西, 杜西)[뒤새], 성밑[성저, 성하], 구호동 등이 있다. 영주동 명칭은 일제강점기 영주면 소재지에서 유래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천군 봉향면 하망동·성저동 각 일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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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영주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장터에서 일어났다.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은 박인서(朴仁緖)·오하근(吳夏根)·권태중(權泰中)이 주도했다. 박인서·오하근·권태중은 준비해 간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출동한 일본군 헌병들에게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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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하근(吳夏根)[1897~1963]은 1919년 영주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오하근의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농고(聾故)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오응철(吳應澈)이며, 1897년 10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조암동 사일마을에서 태어났다. 오하근은 농촌에서 농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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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에게 식민통치를 당했던 영주 지역의 역사.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은 식민지 수탈 상황 속에서 전개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영주 지역은 일제의 식민정책 기조에 따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주군이 새로 생겼으며, 1940년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또 1910년대 일제의 무단 폭압정치 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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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시에서 공공문제 해결 및 공공서비스의 생산·분배와 관련되어 행해지는 제반 활동. 행정의 주된 역할과 기능은 일반적으로 근대 국가 성립 이후 1900년대 초까지는 국가의 질서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국민의 일상생활 전반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그 역할과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기존 질서유지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간접시설의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