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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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재호는 유년 시절 윤현진으로부터 항일 정신을 배웠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양산군 양산읍에서 장이 선 날을 이용하여 엄주태, 박삼도, 전병건, 정주봉 등과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강재호는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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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2년 김시학·성상호 등과 공모하여 1932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해 부산 시내 노동자를 선동하여 시위를 감행하기로 한 뒤, 1932년 4월 27일 부산불교학원 내에 있는 등사판을 절취하고 격문 300장을 등사하여 부산 지역에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8월 1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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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말복은 조국의 광복에 헌신하고자 신학문을 배우며 항일 민족 의식을 키웠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통도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韓龍雲)의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사』 및 『님의 침묵』 등의 저서를 읽었고,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전수학교를 거쳐 1936년 동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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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범어사 승려로서 김법린, 김상헌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다시 범어사로 돌아와서 3월 18일 범어사 만세 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1919년 4월 2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0년 1월 29일에 출옥하였다.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였는데, 일명 김일성으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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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범어사로 출가하여 지방학림을 졸업하였다. 이후 불교 전문 강원을 다니면서 서울에서의 3·1운동에 범어사 대표로 김법린, 김상헌,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범어사 만세 운동 때 주동자로 체포되었다가 연행 중 차상명과 탈출하였다. 다음날 다시 만세 의거에 참여한 후 동래경찰서에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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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1912년 양산군 동면 석산리에서 태어난 김외득은 서울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 시위 운동을 펼쳤다. 이 사건으로 구류 15일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에 가입, 소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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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8년 3월 23일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4월 4일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소년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16일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탈옥시키기 위해,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 전병건(全秉健)의 지령에 따라 300여 명의 조합원을 동원하여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검거되었다. 193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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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1년에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에 최달수(崔達守) 등의 권유로 소년부에 가입하였다. 1932년 3월 15일 양산경찰서에서 ‘소작료 4할 결의’를 하였다는 이유로 조합원 간부 17명을 구류 처분하자, 전병건(全秉健)의 지시에 따라 16일 조합원 300여 명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김태근도 주동자 김장호(金章浩) 등과 함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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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삼도는 1919년 3월 12일 친구 엄주태가 부산 동래고보 만세 시위에 참가한 후 양산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 시도를 제안하자 이귀수·정주봉 등과 함께 거사일과 거사 진행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에 1919년 3월 27일인 양산 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 200매와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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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어려서 범어사에 출가하여 명정학교를 다닌 박영주(朴永珠)는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김영규·차상명 등 7명과 함께 범어사 자체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일을 1919년 3월 18일 동래읍 장날로 정했다. 예정된 날이 오자 1919년 3월 18일에서 다음 날인 19일 까지 이틀간 동래시장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이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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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임갑(朴壬甲)은 1902년 아버지 박도전(朴道銓)과 어머니 문지순(文池順)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양서경(梁瑞慶)과 결혼하여 양산시 남부동에서 정미소를 경영하였다. 1990년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타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4학년 학생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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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이루어지는 법에 의한 민사 및 형사 사건의 재판과 그에 관련된 국가 작용. 일반적으로 사법은 입법, 행정과 함께 국가 통치 작용의 하나이다. 개인 상호 간 또는 국가와 개인 간의 법률 관계에 관한 쟁의로 소송이 제기될 경우 무엇이 적법인가를 선언하는 행위로서 그 범위는 국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사법 제도는 좁은 의미로 재판 제도를 의미하나, 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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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손군호는 1901년 9월 24일에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평산리(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손군호는 신학문을 배워야만 우리나라도 문명화가 빨리 되겠다는 생각에 보통교육과정의 명정학교와 중등교육 과정의 지방학림이 있던 범어사를 찾아갔다. 집과의 거리가 수십 리 원거리이었기에 범어사에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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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읍(梁山邑) 장날을 이용하여 엄주태(嚴柱泰)·김동건(金東健)·박삼도(朴三道)·정주봉(鄭周奉)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 22일 부산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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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상수(安上水)는 1879년 아버지 안덕진(安德振)과 어머니 김재일(金在日)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순악(金順岳)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며, 1939년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교리에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 양산의 항일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양산농민조합의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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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명호(梁明浩)는 1870년 아버지 양갑주(梁甲柱)와 어머니 오분출(吳分出)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18년 김순등(金順登)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1946년 타계했다. 양명호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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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춘도(楊春到)는 1902년 아버지 양경률(楊敬律)과 어머니 고상남(高尙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내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에 출가하여 명정학교를 다니면서 승적(僧籍)을 가졌다. 1937년 박무금(朴武今)과 결혼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양춘도는 1919년 3월 18일 동래시장 만세 운동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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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엄주태(嚴柱泰)는 1919년 3월 27일 전병건(全秉健)·박삼도(朴三道) 등과 같이 독립 선언문(獨立宣言文)과 경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할 것을 협의하고 200여 매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양산읍(梁山邑) 장날에 운집한 3,000여 민중에게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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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양산 장터에서 일어난 양산읍 만세 운동에 이어 이귀수 등과 함께 모의하여 양산읍 2차 의거를 주도하였다. 4월 1일 오후 2시경 2,000여 군중이 모여들자 유경문은 이귀수와 함께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양산군청과 헌병 분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항의하였다. 일본 경찰의 공포탄 발사와 총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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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수만(尹守萬)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에 항거하였다. 1932년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여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윤수만은 이 사건으로 검거되어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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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개득(李介得)은 1903년 아버지 이재영(李宰永)과 어머니 권보배(權寶培)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복쇠(金福釗)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며, 1973년 양산시 북정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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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제1차 양산의거에 엄주태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함께한 사람들은 대거 피검되었으나, 이귀수는 잠시 피신하였다가 류경문과 함께 제2차 양산의거를 모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양산장에서 2,000여 군중을 동원하여 제2차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양산군청과 헌병분견소로 진격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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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만춘(李萬春)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만춘은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만춘은 이 일로 검거되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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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희우(李禧佑)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희우는 다른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희우는 이 일로 검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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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수만(林壽萬)은 1903년 아버지 임갑이(林甲伊)와 어머니 김소임(金小任)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조봉아(趙奉兒)와 결혼하여 2남 6녀를 두었으며, 1992년 김해시 삼방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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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정선(旌善). 병한(秉翰)은 별명이고, 본명은 전병익(全秉翼)이다. 전병한은 1915년 3월 25일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는데(제3회), 엄주태(嚴柱泰)·서상근(徐相根) 등이 동기생이다. 엄주태·전병건(全秉健)이 주도한 양산만세운동의 모의에 동참하여,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을 기해 3,000여 군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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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3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교사 홍재문(洪在文)과 학생 배수원(裵守元) 등이 모의하여 부산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8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 전봉호(全鳳浩)는 이갑이(李甲伊) 등 일신여학교 학생과 주민을 동원하여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때 전봉호는 주동 학생으로 검거되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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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기옥(鄭冀鈺)은 1906년 아버지 정재관(鄭在瓘)과 어머니 김복림(金福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1929년 이명련(李命連)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으며, 1999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타계했다. 1932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다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구출하는 작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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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주봉(鄭周奉)은 1901년 아버지 정갑룡(鄭甲龍)과 어머니 정아기(鄭兒其)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김갑선(金甲先)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 이후인 1944년에는 배희이(裵喜伊)와 재혼하였다. 1959년 3월 30일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에서 타계하였다. 정주봉은 1919년 3월 경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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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진영(鄭鎭永)은 1916년 아버지 정원모(鄭原謨)와 어머니 박인수(朴因洙)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1년 정순임(丁順任)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1982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타계했다. 정진영은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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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지용준(池龍俊)은 1894년 아버지 지재연(池載演)과 어머니 박치숙(朴致淑)의 막내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로 출가하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승적을 가졌으나, 1924년 김기장(金琪莊)과 결혼하였다. 해방 후 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2동의 동장을 역임하였다. 금정중학교의 범어사 3·1운동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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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차상명(車相明)은 1895년 아버지 차인수(車仁守)와 어머니 이수년(李守年)의 장남으로 동래군 동래면 교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범어사에 들어가 명정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 최학전(崔學傳)과 결혼하여 외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945년 부산시 동래구 남산동에서 타계했다. 서울에서 거족적인 3·1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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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달수(崔達守)는 1916년 아버지 최성운(崔聖運)과 어머니 이금옥(李今玉)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김기출(金己出)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으며, 1962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에서 타계했다. 최달수는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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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동선(韓東善)은 1915년 아버지 한암외(韓岩外)와 어머니 손숙이(孫淑伊)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9년 김차열(金次烈)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1966년 타계했다. 한동선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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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함성관(咸成寬)은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구출 작전에 다른 조합원과 함께 가담하여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벌금 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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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홍인범(洪仁犯)은 1931년 4월 4일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일원으로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적극적인 농민 운동을 펼치다 1932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32년 2월 20일 양산농민조합은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소작권 영구 확립, 지세 및 기타 공과금 지주 부담, 소작료 4할 등의 내용을 결의한 것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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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만우는 범어사에 있는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 학생으로서 1919년 3월 범어사 학생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학생 40여 명은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西門) 부근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南門)에 이르기까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 황만우 등 10여 명의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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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황원석(黃元錫, 법명 만우)은 1912년 범어사로 출가하여 수도승이 되었으며 1919년 당시 범어사의 보통학교 과정인 명정학교와 중등학교 과정(3년)인 지방학림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범어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범어사의 만세 운동은 학생 의거로 일어났으나 불교계의 지도층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1919년 3월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