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509
한자 維楊里 山告祀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집필자 서영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성격 민간 신앙|마을 제사
의례 시기/일시 음력 8월 3일

[정의]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유양리 산고사는 음력 8월 3일 밤 자정 이후에 불곡산 8부 능선에 있는 산제 터에서 도당굿과 함께 과거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 주민 모두가 태평하고 탈이 없기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던 제사이다. 원래 유양리[유양동]에서는 도당굿과 함께 산고사[산신제]를 매년 음력 2월 3일과 8월 3일 두 차례를 지냈으나 1970~1980년대 이후로 가을에만 지냈다. 유양리 도당굿이 부녀자들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이라면 유양리 산고사는 남자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는 행사이다.

[연원 및 변천]

6·25 전쟁이 있기 전까지 유양리 산신제는 음력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언제부턴가 3월의 산제사는 생략되고 8월의 산신제만 지내 왔다.

[신당/신체의 형태]

원래 산제당은 토담에 이엉을 얹은 초가집으로 해마다 이엉을 다시 입히곤 했다. 그런데 이 산제당은 6·25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소실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산제당을 다시 세웠으나 미군이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는 산고사를 산제당이 있던 빈 터에서 그냥 지내는데, 당일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고사 터에 천막을 치고 제례를 올렸다. 산제당이 소실된 뒤로 제기와 제사용 각종 기물들은 마을 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산신제를 지내던 고사 터는 유양동불곡산 8부 능선에 있는데, 여기에 5백여 년이 된 당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유양리 산제사에서 모시는 산신은 남자 신이다. 남자 신은 산제사의 대상이며, 여자 신은 도당굿으로 따로 모셨다.

[절차]

산제가 있는 날, 아침 9시 경에 제관 일행은 고사 터로 올라가 우물과 그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청소를 끝내면 가지고 간 천막을 치고 쌀을 씻어 밥을 해 먹고 산제가 끝날 때까지 산을 내려오지 않는다.

저녁 무렵이 되면 마을에서 제물을 준비해 지게에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간다. 제사는 밤 12시 경에 시작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천막 안에 제물을 진설하는데 특이하게도 제물은 떡갈잎을 따서 깔고 그 위에 올려놓는다. 메 역시 떡갈잎 석 장을 따서 각기 한 숟가락씩 그 위에 떠 놓는다. 이렇게 진설한 제물은 밤새 그대로 놓아둔다. 촛불 2개도 밤새 타도록 그대로 놔둔다. 진설한 제물들을 밤새 들짐승이 먹어 치우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제사는 두 곳에서 지낸다. 고사 터 바로 위에 있는 큰 바위에서 제사를 지낸 다음 당산나무가 있는 고사 터에서 다시 지낸다. 제물을 진설하고 나면 초헌관, 아헌관이 헌작 재배를 하고, 독축을 하고 나서 일제히 참가자 모두 재배를 한다. 마을 이장이 종헌관이 되어 헌작을 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재배하고 소지를 한다. 소지는 유양리 주민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이 과정이 끝나면 곧바로 마을 주민 각자의 개인 소지를 올린다.

소지가 끝나면 약 30분 정도 제물을 그대로 놔두었다가 상을 물린다. 철상에 이어 음복을 하고 서너 시간 가량 소머리를 삶는다. 음복은 소머리를 삶기 전에 한다. 그리고 제물을 비닐 봉투에 조금씩 나누어 담아 다음날 아침 집집마다 돌릴 반기를 준비해 가지고 산을 내려온다. 산을 내려오기 전, 해가 뜨면 고사 터 주변을 깨끗하게 치우고 떠난다. 산에 오르면 날씨가 춥고 밤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모닥불을 피우는데, 황달불이라 하는 이 불을 피운 자리도 말끔히 치운다.

[축문]

제한적이긴 하지만 축문도 시대상을 반영한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축문의 내용도 조금씩 바뀌어 왔다. 1990년대 말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남북통일, 평화 등과 같은 염원들을 축문에 넣은 것으로 보아 축문도 세월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변화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유양리 산고사의 축문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잘 남아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유 세차 정축 팔월 기유 삭 삼일 초헌 통정 아헌 통정 종헌 통정 감소고우 불국산왕대신 지공지찰 자산황야 오곡 등 부근 중생 무유안과 우순풍조 시종여일 무재수확 남북통일 평화건설 제기지성 봉헌 근이청작 포혜지천우신 상향(維 歲次 丁丑 八月 己酉 朔 三日 初獻 通政 亞獻 通政 終獻 通政 敢昭告于 拂國山王大神 至公至察 紫山黃野 五穀 登 府近 衆生 無由安過 雨順風調 始終如一 無災收穫 南北統一 平和建設 祭基至誠 奉獻 謹以淸酌 脯醯祗薦于神 尙饗).”

아울러 대동 소지의 축언(祝言)도 있다.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 리민 여러분이 일 년 열두 달 삼백 육십오 일이 하루같이 몸 건강하게 도와주시고 또 객지에 나가서 있는 자손들도 몸 건강히 사업에 충실하게 거저 산왕대신(山王大神)님께 소지 올리오니 잘 돌봐 주시기를 빌고 바랍니다.”[1970년대 조사 자료]

유양리 각 개인을 위한 축언은 다음과 같다.

“이 소지는 유양리 정미소업을 하고 있는 이경택씨 소지올시다. 방아 잘 돌아가고 쌀 잘 빠지게 하고, 고생 안 하게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매년 치성 때만 되면 큰마음으로 부조를 해 주시는데 기계 고장도 안 나고, 벼 한 가마 찧으면 쌀이 여섯 말 일곱 말씩 쏟아지게 잘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1970년대 조사 자료]

[부대 행사]

산신제를 지낸 뒤에 곧바로 참석자들은 음복을 하고 제물 중 일부를 화주(化主)의 집에 보낸다. 큰 소를 잡아 산신제를 지내던 때에는 마을 각 집마다 소고기를 돌렸으며, 돼지를 제물로 잡아 쓸 때에도 돼지를 삶아 음복을 하고 나머지를 마을로 가지고 내려와 마을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었다.

[현황]

1970년대 말에 이미 제수를 마련하고 산제를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산신제에 부담을 가졌다. 마을 사람들이 산제사에 대한 믿음도 점차 옅어져 가고 비용을 부담하기를 기피하면서 산제사는 점차 치르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를 끝으로 유양리 산제사도 유명무실해졌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