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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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秉召 |
영어공식명칭 | Yoon Byungso |
이칭/별칭 | 병소(秉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병권 |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이 속해 있던 옛 시흥군 수암면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개설]
윤병소(尹秉召)[1893~1919]는 1919년 당시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지금의 시흥시 능곡동]에 거주하였다.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로부터 피체(被逮)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고인의 업적을 기려 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이명은 병소(秉昭), 자는 성서(聖瑞). 판관공 윤은(尹訔)의 14대손이다.
[활동 사항]
윤병소는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지금의 화성시 남양읍]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 182번지에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비립동(碑立洞)] 등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윤병소는 3월 29일 이봉구(李鳳求)로부터 수암면 화정리 일대에 이튿날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가를 권하는 격문이 돌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수암면 능곡리의 아버지 집에도 같은 취지의 통문이 온 것을 동생에게 들었다.
윤병소는 3월 30일 오전 10시경 집합 장소인 수암면 비석거리로 나갔다. 이곳에서 홍순칠(洪淳七), 류익수(柳益秀), 윤동욱(尹東旭), 김병권(金秉權), 이봉문(李奉文) 등과 함께 18개 동·리에서 모인 2천여 명의 대대적인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와리 사람들이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수암면 읍내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 군중과 함께 안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안산초등학교], 수암경찰서 주재소[지금의 안산시 수암동 478-1], 수암면사무소[지금의 안산읍성 및 관아지], 안산향교를 차례로 돌며 시위 행진을 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일제가 4월 5일 주동자 일제 검거를 실시하여 지목된 류익수,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 등과 체포되었다. 윤병소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회부되어 5월 27일 1심 판결에서 판사 카가미[鏡一以]로부터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윤병소는 「사법경찰관의 보안법 위반자 동행 보고」에서 “자신은 충심으로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자로서 그 독립을 얻기 위하여 만세운동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14년 8월 15일 안산 지역사 연구 모임에서 '비석거리 3.1운동 기념비'[안산시 상록구 수암길 17]와 시흥시에서도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군자초등학교 내]를 세우고 여러 애국지사들과 함께 매년 기념식과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남원윤씨 영사정 묘역[김포시 향토유적 13호,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 산29-1] ‘화중원(和仲園)’에 ‘항일지사 윤병소 비'와 화성 3.1운동 만세길 방문자 센터[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산61-1] 내 추모벽을 세워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