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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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膺大君 |
영어공식명칭 | Yeongeung Prince |
이칭/별칭 | 염(琰),명지(明之),서곡(西谷),경효(敬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창현 |
출생 시기/일시 | 1434년 - 영응대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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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41년 - 영흥대군에 책봉 |
활동 시기/일시 | 1443년 - 영흥대군에서 역양대군으로 개봉 |
활동 시기/일시 | 1447년 - 역양대군에서 영응대군으로 개봉 |
몰년 시기/일시 | 1467년 - 영응대군 사망 |
묘소|단소 |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70 |
성격 | 왕자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 묘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 세종의 여덟 번째 왕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염(琰),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 영응대군(永膺大君)[1434~1467]의 증조할아버지는 태조, 할아버지는 태종, 아버지는 세종,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로 청송 심씨(靑松沈氏)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처음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후에 여산 송씨가 병으로 내쫓긴 뒤 해주 정씨(海州鄭氏) 한성부윤(漢城府尹) 정충경(鄭忠敬)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활동 사항]
1441년(세종 23)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졌다가, 1443년(세종 25)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세종 29)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종은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영응대군 이염(李琰)을 특히 사랑하였다. 1444년(세종 26) 영응대군 배필을 정할 때 세종이 친히 사정전(思政殿)에서 처녀를 간선(簡選)하였고, 1449년(세종 31) 세종이 영응대군 집으로 옮겨가서 이듬해 그곳에서 승하할 정도였다. 아울러 세종은 수양대군[세조]에게 영응대군을 잘 돌보아 주도록 특별히 부탁하여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대우하였다. 집안의 노비가 아주 많았지만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저술 및 작품]
1463년(세조 9)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音律)에 밝았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70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諡號)는 경효(敬孝)이다. 신도비는 1498년(연산군 4) 세워졌다.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이 비문을 짓고 전액(篆額)도 했으며, 글씨는 용양위부사정(龍驤衛副司正) 박경(朴耕)이 썼다. 묘 입구에 재실인 경효재(敬孝齋)와 사당인 경효사(敬孝祠)가 있다.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는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