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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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龜孫墓 |
영어공식명칭 | Tomb of Gang Gwis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하상로 59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창현 |
조성 시기/일시 | 1505년 - 강귀손 묘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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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450년 - 강귀손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505년 - 강귀손 사망 |
현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하상로 59[하상동 산2] |
성격 | 묘소 |
양식 | 원형 쌍분 |
관련 인물 | 강귀손 |
소유자 | 진주 강씨 문량공파 종중 |
관리자 | 진주 강씨 문량공파 종중 |
[정의]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강귀손의 묘.
[개설]
강귀손(姜龜孫)[1450~1505] 묘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문량공파(文良公派) 묘역에 있으며 부인과 함께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어 있다. 강귀손의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 강희맹(姜希孟), 어머니는 관찰사(觀察使) 안숭효(安崇孝)의 딸이다. 1479년(성종 1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486년(성종 17) 중시(重試)에도 2등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도승지,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사헌부대사헌으로서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의 처벌을 가볍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형조판서, 이조판서, 의정부좌찬성 등의 요직을 지냈다. 1505년(연산군 11) 우의정에 올라 명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러 명나라로 가는 도중에 등창(-瘡)으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위치]
강귀손 묘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연꽃마을 너머 야트막한 구릉의 진주 강씨 문량공파 묘역에 있다. 강귀손 묘 근처에는 아버지 강희맹과 그의 후손들의 묘가 함께 있으며 아버지 강희맹의 묘 좌측에 있다. 묘역 앞쪽으로 1999년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다.
[형태]
강귀손 묘는 부인과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묘 중앙에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향로석·장명등이 있으며 묘 앞 좌우에 문인석이 있다. 묘비와 문인석 외의 다른 석물들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좌우의 문인석은 두 손이 허리 부근의 소매 속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는 형태이다. 강희맹 묘의 문인석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형태이다. 혹자는 보주형(寶珠形) 투구를 쓴 무인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육합모(六合帽)를 쓴 문인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금석문]
묘비에는 “의정부우의정 진원군 증 시숙헌공 강공지묘 정경부인 송씨 부장(議政府右議政晉原君贈諡淑憲公姜公之墓貞敬夫人宋氏祔葬)”이라고 적혀 있다.
[현황]
진주 강씨 문량공파 묘역 입구에는 근년에 조성된 문량공 사우(文良公祠宇)와 재실(齋室)인 연성재(蓮城齋), 강희안(姜希顔)·강희맹·강귀손 신도비 3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강귀손 묘는 조선 전기 사대부 무덤의 석물 형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특히 진주 강씨 문량공파 묘역의 문인석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