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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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川郡 |
영어공식명칭 | Incheongun |
이칭/별칭 | 미추홀(彌趨忽),매소홀(買召忽),소성(邵城),경원(慶源),인주(仁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신현동 지역 일대를 1413년부터 1460년까지 관할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
[개설]
조선 초기 인주(仁州)로 불리던 인천광역시는 1413년(태종 13) 고려 왕실의 잔재 청산과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중앙집권 강화를 위하여 경기도 인천군(仁川郡)으로 강등, 축소되었다. 당시 경원부(慶源府)의 옛 이름인 인주의 '인(仁)' 자와 주·부·군·현에 '산(山)'이나 '천(川)'을 붙이도록 한 행정구역 개편 원칙에 따라 ‘인천(仁川)’으로 개명하였다. 이때 인천이라는 읍호(邑號)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인천군은 신현면, 전반면, 황등천면 등 지금의 시흥시 신현동 지역 일대를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13년(태종 13) 고려 왕실의 잔재 청산과 태종의 중앙집권 강화를 위하여 인주에서 인천군으로 강등, 축소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 「경기 인천도호부」에 기록된 인천군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다. 또는 미추홀(彌趨忽)이라 한다. 신라 경덕왕이 소성(邵城)으로 고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수주(樹州)에 붙였고, 숙종 때에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의 본관이므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고, 인종이 또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의 본관이므로 지인주사(知人州事)로 고치고, 공양왕 2년에 경원부로 승격하였다. 왕이 처음에 즉위하여 칠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승격시키고, 또 고을 호장(戶長)에게 붉은 가죽띠를 주었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로 만들었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예에 의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세조 6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가 고을이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로 만들었다.”
[내용]
조선시대 인천군에 속했던 시흥시 신현동 지역은 오래전부터 바다와 인접해 있어 포촌리(浦村里), 포리포(浦里浦) 등과 같이 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았다. 대규모 제언인 '호조방죽'이 축조되기 전까지 어촌 지역으로 넓은 간석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의 시흥시 방산동과 포동 지역은 예전부터 지리적으로 안정된 항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서해안을 통해 해상 교류와 문물 수입에 유리하였다. 특히 방산동에는 중국의 자기 제작 기술을 수용하여 형성된 가마터인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사적 제413호]'가 있다.
[변천]
인천군은 1460년(세조 6년) 국방 체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세종의 비이자 세조의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1688년(숙종 14) 승려 여환(呂還) 등의 모반 사건으로 인천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97년(숙종 23) 다시 인천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12년(순조 12) 진채(振采)의 역모 사건으로 다시 인천현으로 강등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에 따라 인천부로 되는 등 여러 차례 변동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