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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712
한자 瑞山龍大旗-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놀이/놀이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놀이
노는 시기 음력 6월 김매기철
관련 의례 행사 기 세배|풍물놀이

[정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두레의 김매기와 두레싸움, 기 세배 등을 재구성한 놀이.

[개설]

서산 용대기놀이는 두레가 났음을 알리는 두레고사와 김을 매는 과정, 그리고 맞두레가 났을 때의 두레싸움 및 승부가 난 뒤에 형 두레와 아우 두레가 서로 기 세배를 하며 화합을 다지는 풍물놀이 등을 민속놀이로 재구성하여 연출한 것이다.

예전에는 김매기철이 도래하면 마을마다 두레를 조직하여 논을 맸다. 김매기는 아시매기·이듬매기·만물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두레의 공동 노동으로 아시매기와 이듬매기 두 번을 매는 것이 관행이었다. 선소리꾼이 구성지게 소리를 메기면 두레꾼들은 후렴을 반복하며 흥겹게 논을 맨다. 용대기놀이의 절정은 두레싸움이다. 이 싸움은 맞두레가 났을 때 으레 벌어지기 마련인데, 인근에서 김매기를 하던 두레꾼들이 다른 논으로 이동을 하다가 막다른 길목에서 두 마을이 마주치면 서로 먼저 길을 트라고 시비를 벌이다가 두레싸움으로 비화된다.

가령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의 경우 문전옥답이 위치한 마을 어귀에는 인근의 장요리가구리에서도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았다. 따라서 용대기를 앞세우고 논을 매러 가거나 다른 논으로 이동을 할 때는 이웃 마을의 두레패와 마주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그러면 두 마을의 두레꾼들은 서로 먼저 인사를 하라고 실랑이를 벌인다. 이때 두레기를 늦게 만든 마을에서 용대기를 숙여 기 세배를 하고 가는 게 관례로 되어 있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인사를 하지 않거나 불손한 태도를 보이면 급기야 험악한 두레싸움이 벌어졌다.

[놀이 방법]

두레싸움은 상대의 농기를 먼저 쓰러뜨리거나 용대기 위에 꽂은 꿩장목을 빼앗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두 마을의 두레꾼들은 죽기 살기로 상대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기세를 올렸다.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에서는 예전에 두레싸움이 벌어지면 마을에 힘 센 장정이 많이 있어서 다른 마을에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근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가구리의 두레패는 으레 용대기를 빼앗기고 심하게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러나 두레싸움이 반드시 두 마을 사이의 패싸움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일단 승부가 나면 진 마을에서는 예를 갖춰 상대방 용대기에 기 세배를 하였고, 두 마을이 한바탕 합굿을 벌이며 신명나게 풍물을 울린 다음 길을 터주었다.

2011년 10월 전라남도여수에서 열린 제52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충청남도 대표로 출연한 ‘서산 덕지내 돌개미 두레놀이’의 구성과 연출은 다음과 같다.

1. 준비마당 : 돌개미와 덕지내 두 팀으로 편을 나누어서 각자 입장할 위치에 선다. 두 마을의 풍물패는 상쇠의 신호에 따라 흥겹게 풍장을 울리며 김을 매러간다.

2. 들어서는 마당 : 두 마을의 풍물패와 두레꾼들은 영좌-마을기-용대기-영기-풍물패-논주인-모쟁이-농군-맞두레-물바가지-쑥불-새참여인-용두레-지게꾼 등의 순으로 모내기를 하러 논으로 들어간다.

3. 논매기마당 : 두 마을의 풍물패들은 좌상의 지시에 따라 논을 맨다. 이때 북을 울리는 선소리꾼이 구성지게 김매는 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일꾼들은 후렴을 따라 부르며 호미로 김매기를 한다.

4. 새참마당 : 논을 매던 두레꾼들은 새참을 먹으러간다.

5. 용대기싸움 : 행진을 하다가 마주친 덕지내와 돌개미 두레꾼들은 서로 형님이라 우기며 길을 비키라고 시비를 벌이다가 격렬하게 용대기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에서 패한 돌개미 두레는 아우가 되어 덕지내 용대기에게 예를 갖춰 기세배를 올린다.

6. 놀이마당 : 두 마을의 두레꾼들은 풍물소리에 어우러져 한바탕 난장을 벌이며 흥겹게 놀이를 펼친다.

7. 맺음마당 : 놀이를 마친 두레꾼들은 다시 풍물을 앞세우고 논을 매러간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서산 지역의 두레기[농기]는 용이 그려진 용대기가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은 1899년 제작된 동문동 향교골 용대기에서 오랜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지금도 두레기가 남아 있는 고북면 초록리 용대기, 덕지천동 용대기 등에서도 그 전통이 폭넓게 확인되고 있다.

지난날 두레의 용대기는 마을을 상징하는 깃발로서 매우 신성시되었다. 때문에 비단 두레의 김매기뿐 아니라 정월 대보름이나 이월 초하룻날 지신밟기를 할 때, 또 볏가릿대를 세우거나 내릴 때에는 용대기를 앞세우고 가서 농사의 풍년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상대편에 꿩장목을 빼앗기거나 용대기가 쓰러진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모욕이 아닐 수 없으니, 두레꾼들은 마을의 자존심을 걸고 두레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5.03 본문 내용 추가 집필자 교열 내용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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