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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441
한자 鎭東樓
영어공식명칭 Jindongru
이칭/별칭 동문루,안해루,세병루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시대 조선
집필자 최장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11년(중종 6)연표보기 - 진동루 부사 이함이 창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8년 - 삼척포진영 화재로 진동루 소실
소재지 진동루 -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 지도보기
성격 누각

[정의]

조선시대 강원도 삼척 지역 삼척포진성의 동문루.

[개설]

삼척시 정상동 육향산(六香山) 아래에는 석성(石城)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동해를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조선시대의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이다. 이 진영(鎭營)의 성(城) 동문루(東門樓)를 진동루(鎭東樓), 안해루(晏海樓), 세병루(洗兵樓)라고도 불렀다.

삼척포진성은 원래 삼척시 오분동 뒷산 해변의 험준한 산성에 진영이 있었는데 이곳 정라동육향산으로 옮긴 것은 조선조 중종 때인 것으로 보인다. 1520년(중종 15) 육향산 아래에 석성을 쌓았다. 둘레가 900척[약 270m]이고 높이가 8척[약 242㎝]이라 하였으니 그리 넓은 성은 아니었다. 이 성의 동문루가 진동루이며, 영장이 수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영장은 정3품의 무관이었다. 영동 9개 군, 즉 평해, 울진, 삼척, 강릉, 양양, 간성, 고성, 통천, 흡곡의 수군(水軍)을 총괄하였다. 현종 때부터는 영장이 도적을 잡는 직책인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되어 영동 9개 군뿐만 아니라 울릉도까지 관장하였다.

진동루 앞에는 오십천이 흘러 바다와 맞닿는 곳으로, 자연 항구이다. 강 건너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어 건너불이라 불리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수철(水鐵)이 산출된다고 하였다. 성종 때 삼척포 수군을 동원하여 수철을 채취, 소금가마[염부(鹽釜)]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이곳은 불래포(佛來浦)라 하여 옛날 서방국에서 돌배[석함(石艦)]에다 부처의 사리를 싣고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그 사리를 갈래산(葛來山)[현 갈야산]에 안치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불래포(佛來浦)라고도 부른다.

또 저 멀리 신라시대 이사부(異斯夫)울릉도를 정벌할 때 나무사자를 배에 가득 싣고 출발한 곳도 이곳이다. 신라지증왕 때인 512년(지증왕 13) 이사부는 실직성(悉直城)을 근거지로 하여 영동 일대를 수복한 뒤 실직동방 우산국(于山國)을 칠 계획으로 목우사자(木偶獅子,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만들어서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해안에 이르러 거짓말로 알리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 모조리 짓밟아 죽일 것이다.”라고 하니 우산국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우산국은 조선조 말까지 삼척에서 관리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 울릉도가 경상도에 속하게 된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육향산 아래에는 많은 영장 선정비와 불망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진동루는 경관도 좋아 척주팔경(陟州八景)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옛 선인들이 이 고장의 많은 경관 가운데 빼어난 곳을 골라 척주팔경이라 하여 탐승(探勝)하기를 좋아하였다. 척주팔경은 즉 죽서루, 진동루, 연근당, 회강정, 무릉계, 만경대, 능파대, 취병산의 여덟 명승지를 일컫는다.

[변천]

진동루는 1511년(중종 6)에 부사 이함(李涵)이 창건하였다. 1556년(명종 11)에 부사 김희삼(金希參)[1507~1560]이 중수하였고 1576년(선조 10)에 부사 김효원(金孝元)[1542~1590]이 진동루(鎭東樓)라고 제액(題額)하였다. 1586년(선조 19)에 부사 강세윤(姜世胤)[1684~1741]이 중수하였다. 1603년(선조 36)에 부사 안종록(安鍾祿)은 임진왜란 때 영은사 800근의 불종(佛鐘)을 이곳에 옮겨 달고 위급 시 종을 쳐서 주민들을 모아 적을 막다가 나중에 돌려주었다. 1672년(현종 13)에 부사 이수강(李守綱)이 중창하고, 1676년(숙종 2)에 부사 이선(李選)이 단청(丹靑)하였다. 1711년(숙종 37)에는 부사 이성조(李聖肇)[1662~1739]가 중수를 하면서 안해루(晏海樓)라 개명하여 현판을 달았고, 죽서루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도 썼다. 1743년(영조 19)에 부사 최상정(崔尙鼎)이 중수하였고, 1887년(고종 24)에 소남(小南)이희수(李喜秀)[1836~1909]가 진동루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모든 제도가 개혁됨에 따라 각 지방에 있던 진영을 폐지함으로써 삼척포진영도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1898년 삼척포진영 아사가 화재를 당하여 진동루도 함께 없어졌다.

[위치]

진동루정상동육향산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주소로 강원도 삼척시 새천년도로 23 일대[정상동육향산 근처]로 추정된다.

[현황]

1898년 삼척포진영 화재로 진동루는 소실되었으며, 현재 삼척포진성의 일부 성벽터가 발견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육향산에서 영진안 마을에 이르는 지역 일대의 석축 흔적과 관련 문헌 기록을 토대로 삼척포진성의 입지를 추정할 수 있다. 광여도(廣輿圖) 등 고지도를 비롯한 수군 직제 및 삼척포진성의 위상을 고려할 때 진동루는 홍예식 문루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도 수호의 상징 인물인 이사부와 관련된 삼척포진성의 동문루이기 때문에 역사 가치를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한편 동해 방어의 최전방 군사작전 기지로서의 역사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복원정비 계획이 요구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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