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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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甄萱 |
영어음역 | Gyeon H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후백제 |
집필자 | 고수연 |
[정의]
후백제의 초대 왕.
[가계]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된 아자개(阿慈介)이며, 어머니는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 중 누구인지, 또 그 성씨가 무엇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동생은 능애(能哀), 용개(龍蓋), 보개(寶蓋), 소개(小蓋)이며 누나는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
[활동사항]
견훤은 892년(진성여왕 6) 신라 왕실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무진주(武珍州, 현 광주광역시)를 점령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계속 세력을 넓혀 900년 완산주(完山州, 현 전라북도 전주시)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부터 국호와 왕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나름대로의 영토전쟁을 벌이며 신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후당(後唐)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었다. 918년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고려와 잦은 세력 다툼을 벌였으며,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견훤은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자식들의 싸움에 휘말려 큰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도망을 쳐 고려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왕건으로부터 상보(尙父)라는 칭호를 받고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곧이어 왕건과 함께 황산벌에서 후백제와 싸워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사기』에는 “근심이 심해 등창이 생겨 황산의 저에서 죽었다”고 나와 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견훤은 번민 속에서 생활하다 936년 연산(連山)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견훤이 죽었다는 연산의 불사는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에 있는 개태사(開泰寺)로 추정되는 황산사였다고 한다. 죽을 때 완산(完山)이 그립다는 유언을 하여 완산을 향하여 묻었다고 한다.
[묘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전 견훤 묘(傳甄萱墓)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비롯한 각종 지리지에도 견훤의 묘 위치를 기록하고 있어, 최소한 문헌상으로는 견훤과 관련된 유적임이 증명된다.
[상훈과 추모]
1981년 12월 21일 전 견훤 묘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매년 봄과 가을에 전 견훤 묘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