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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포 교안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247
한자 江景浦敎案事件
영어의미역 The Anti-Christian Movement in Ganggyeongpo Port
이칭/별칭 강경포사건,강경포 장교사사건
분야 역사/근현대,종교/기독교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순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899년 4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9년 10월 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강경포(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일원)
관련인물/단체 베르모렐 신부|김치문|윤성여|최성진|천장옥

[정의]

조선 말기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강경포에서 천주교 신자와 향촌 세력 간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

[개설]

강경포 교안 사건은 천주교 신자인 김치문(빈첸시오)과 소금 상인 조흥도가 충돌하여 시작된 사건으로, 천주교 신자와 일반 주민의 갈등에서 출발하여 주한 프랑스 공사와 대한제국 간의 외교적 갈등으로 확대되어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교안이란 천주교가 먼저 전래된 중국에서 반그리스도교 운동으로 먼저 사용된 용어로 선교 일선에서 천주교측과 토착사회와의 갈등이 발생하였을 때 국내법으로 다루지 않고 외교문제로 취급되어 해결된 사안을 말한다.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된 후부터 1905년 외교권이 박탈될 때까지 발생하였는데, 교안이라는 말 속에서 천주교가 이제 조선 사회에서 박해의 대상이 아니라 정부를 상대로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세력으로 변화하였음을 볼 수 있다.

교안 사건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교회가 민인에게 폐를 끼친 사건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 교폐로 따로 분리하여 보는 시각도 있다. 교폐는 특히 1895년 선교사들의 위상이 급부상하고, 양대인의 위세가 어디서나 우대되면서 자주 나타났다. 여기에는 선교사들이 사법권을 침해하는 경우와, 신도들이 자신들에게도 치외법권이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의 권위를 빙자한 양민 침해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로 나눠볼 수 있다. 강경포 교안 사건, 혹은 장교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교안으로서는 교폐에 속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발단]

논산 지역에는 천주교 박해시대에 박해를 피하여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교인들이 산악지대 등에 은둔하여 지내다가, 1886년 한불조약과 1899년 교민조약이 체결되면서 박해가 완화되자 생업을 위해 마을로 이주해왔다. 이들 이주 교인들과 토착민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처음 일어난 일이 강경포 교안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인 1898년이었다. 김치문(빈첸시오, 방량삼의 비부)과 부유한 소금 상인 조흥도가 언쟁 중에 조흥도가 천주교회를 모욕하고 사람을 동원하여 김치문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경과]

강경공소 신도들은 계속되는 천주교인에 대한 지역민들의 멸시를 참을 수 없어 소속 본당 신부인 나바위 본당의 베르모렐(장약슬) 신부에게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요청하였다. 베르모렐 신부는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모욕과 집단 폭행이 일어났음을 중시하여 관아에 고소하기 전에 복사 박제원(요셉)에게 조흥도를 잡아다가 진상을 묻고 다시 재발하지 않게 조치하도록 지시하였다.

박제원과 대면한 조흥도는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이날 밤 나바위 본당 신자들은 조흥도를 폭행하였다. 이에 조흥도의 사촌인 조흥서의 주선으로 집강 윤성여, 부노 최성진 등의 향촌 지도 세력이 앞장서서 주민들을 모았다. 천장옥·김낙문·최일언·조흥이·조성규 등이 강경·논산·황산의 3포구에 통문을 돌려 한 집당 한 명씩 참여를 독려하여 모인 군중 수천 명이 나바위 성당 사제관에 난입하였다. 이러한 군중동원 방식은 민란시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강경포 교안이 민란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도부격인 윤성여·최성진 등이 베르모렐 신부와 대면 담판 중 일어난 예의문제 시비로 인하여 군중이 복사 박제원을 끌어내어 폭행하였고, 이를 구하러 간 베르모렐 신부도 폭행을 당하였다. 계속되는 쌍방의 폭행 속에 베르모렐 신부는 은진군수에게 호소하고, 신자들은 전주의 보두네(윤사물) 신부에게 기별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4월 6일 서울 주교관에 베르모렐 신부의 위급을 알리는 전보를 쳤고, 전보를 받은 뮈텔(민덕효) 주교는 프랑스 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외부(외무부)에 베르모렐 신부의 구출과 사건의 조사를 요청하였다.

사건은 프랑스 공사와 대한제국 외부에게로 넘어갔다. 교회와 정부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군부도 전주 진위대와 공주 지방대 1소대를 강경포에 파견하여 난동의 주모자 7명을 체포하여 전주에 압송하였다. 은진군수 김일현의 조사 보고서와 베르모렐 신부의 주장이 달라 외부와 프랑스 공사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외부대신은 지방민과 베르모렐 신부 모두의 잘못이라 했고, 프랑스 공사는 베르모렐 신부가 조흥도를 잡아 심문한 것은 잘못이나, 지방민의 행동은 계획된 것이었으므로 처벌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후 외부대신은 법부에 재판을 의뢰하고 천주교인이나 신부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지방관에게 고소하도록 하고, 비난이나 폭행을 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으며 배상을 수락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프랑스 공사는 군함 시위까지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6월 14일 재판이 시작되어 10월 3일까지 판결과 상소를 거듭한 끝에 윤성여·최성진은 태(笞) 100, 징역 15년, 천장옥은 태 100과 징역 10년에 처해졌다. 이후 베르모렐 신부는 강경포로 돌아갔고 실형을 받은 3명도 교회의 요청으로 곧 풀려났다.

[결과]

강경포 교안 사건은 향촌사회의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0년 이후에 강경 지역에서 천주교회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음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본국의 힘에 의지한 교회가 선교지 국가를 상대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게 되는 상황을 잘 보여준다. 신앙의 기준으로 박해받고 있던 신자들을 보호하려는 순수한 동기는 인정되나 그 표현 과정에서 대한제국 정부의 실정법보다는 신자의 보호를 우선시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대인의 위세에 의탁하려는 동기로 입교하게 되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의의와 평가]

선교사들은 프랑스 국민인 자신들이 갖고 있는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천주교 신도에게까지 확대 적용받고자 하여 대한제국 사법권을 침해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부 신도들도 자신에게는 치외법권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여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교사들의 시대인식이나 자신들의 모국이 갖는 제국주의적 경향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으나, 대부분 하층민이었던 천주교 신자들이 향촌의 토호세력에게 당하는 부당한 힘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도 포함하고 있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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