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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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有良 |
영어음역 | Han Yongryang |
이칭/별칭 | 상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동희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상오(相五). 증조부는 승지(承旨) 한복(韓輹), 조부는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한응문(韓應文), 아버지는 수운판관(水運判官) 한경생(韓庚生)이며, 외조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효원(趙孝元) 장인은 병조참판(兵曹參判) 이경헌(李景憲)이다.
[활동사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있던 한유량은 병력을 몰아 직산(稷山)의 행영(行營)으로 달려갔다. 관찰사 정세규(鄭世䂓)가 그를 보고 놀라 기뻐하면 말하기를 “나라의 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각 고을의 수령이 한 사람도 오지 않았는데, 그대가 이렇게 먼저 달려왔으니 성의가 가히 가상하다.”라고 칭찬하였다.
정세규는 정산읍이 기호(畿湖)의 요충지라 생각하여 한용량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지키게 하였다. 정산 지역은 그 덕분에 병자호란 때 큰 탈이 없었다. 그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자리를 옮긴 뒤 정산현 사람들은 한용량의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뒤에 금부도사(禁府都事)·진위현령(振威縣令)·함흥판관(咸興判官)·천안군수(天安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나이 많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둘째 아들 한기유(韓起愈)가 숙종 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에 책봉되면서, 한용량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1756년(영조 32)에는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외친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