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031 |
---|---|
한자 | 韓文俊 |
영어음역 | Han Munjun |
이칭/별칭 | 정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동희 |
[정의]
고려 후기 남원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대흥(大興). 평장사(平章事) 한유충(韓惟忠)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한문준은 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재주 있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외직으로 나가 장주(長州)·장흥(長興)·남원(南原) 세 고을의 부사(副使)와 남경부유수(南京副留守)를 역임하면서 자비로운 정치를 베풀었다.
그의 제자 오세재(吳世材)가 시를 지어 “남녘에서는 세 군(郡)의 풍속을 바로잡았고, 동쪽에서는 한 고을 백성을 어루 만졌다네.”라고 하였더니 세상 사람들이 실상을 그대로 그린 시라고 평하였다.
1170년(명종 초년)에 태부경(太府卿)으로 임명되었다가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承宣)으로 등용되었다. 추밀원부사(副使)로 올라갔다가 송유인(宋有仁)의 뜻에 거슬려 판 사재사사(判司宰司事)로 강직되었다.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참지정사 보문각 태학사 판예부사(參知政事寶文閣太學士判禮部事)로 되었으며, 정당문학 판병부사(政堂文學判兵部事)로 승직되었다. 1184년(명종 14)에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에 올랐는데 인사를 공정히 한다는 평을 받았다.
70세가 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있으면서 날마다 은사(隱士)나 시객(詩客)들과 더불어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준은 사람을 알아보는 지감이 있었으며, 세 번이나 과거를 맡아 보았는데 그가 선발한 인재 중에는 후일의 명사들이 많았다.
[상훈과 추모]
명종은 그가 죽자 3일간의 조회를 정지하였고, 시호를 정의(貞懿)라고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