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952 |
---|---|
한자 | 李希良 |
영어음역 | Yi Huiryang |
이칭/별칭 | 형재,대명거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개설]
이희량은 조선 중기 선조 대부터 인조 대에 활약한 무신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영교위를 거쳐 선전관, 절충장군(折衝將軍), 덕만보권관(德萬堡權官)에 제수되었다. 그는 말년에는 운봉(雲峰)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
[가계]
본관은 영천(寧川), 자는 형재(馨哉), 호는 대명거사(大明居士)이다. 시중 이능간(李凌幹)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선무랑한성판관 이명세(李名世),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활동사항]
이희량은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쌀 200석을 내어 지원군 명의 군량으로 대주었다. 그 뒤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에는 선전관으로서 인조를 호종하여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는 뒤에 척화의 글을 올렸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만약에 강화를 한다면 우리 군사가 패하는 것은 구차하게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른다면, 이 오랑캐는 하늘을 거역하는 반역의 무리이니 우리도 면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안주(安州)와 의주(義州)로 머리와 꼬리를 삼아서 응하면 관북은 씩씩하고 굳세니 그들이 서울을 침노하는 칼날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는 1632년 절충장군으로 승직되었고, 곧 덕만보권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바로 상소하기를 “덕만보는 실로 같은 내지이니 신이 어찌 순군의 뜻을 바꾸어 살기를 도모하는 땅으로 가겠습니까?”라고 하며 사양하였다.
1633년 관서지방의 직관(直官)으로 부임하여 그곳의 피폐한 실정과 기근·한해로 죽어가는 국민들의 고통을 절감하는 근본적인 구휼정책에 대하여 첩(牒)을 올리기도 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그는 운봉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대명거사라고 스스로 부르며 말년을 보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대명거사유고(大明居士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