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67
한자 入島祖
영어음역 Ipdojo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김동전

[정의]

전통 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제주도에 들어와서 정착한 최초의 동일 성씨 선조.

[개설]

제주의 토착 성씨인 고씨·부씨·양씨를 제외하면 제주의 성씨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제주에 들어와 정착했든 그 후손들은 제주에 최초로 정착한 선조를 입도조라 칭하였다.

[유배인 입도조]

○ 제주입도조 가운데는 유배된 사람들이 많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조선 개국에 반대했던 두문동 72인 가운데 제주도에 유배된 한천은 가사리, 김만희(金萬希)곽지리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후일 각각 청주한씨, 김해김씨 좌정승공파의 입도조가 된다.

같은 시기에 이미(李美)·변세청(邊世淸)·허손(許遜) 등도 조선 개국에 반대한 이유로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각기 경주이씨 익재공파·원주변씨·양천허씨 입도조가 되었다. 제주에 유배되었던 한천·김만희·이미를 지칭해 제주에서는 끝내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삼절신(三節臣)이라 부르기도 한다.

○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신덕왕후와 사촌지간으로 전라감사로 있던 강영은 1402년(태종 2) 제주도 함덕에 유배되었고, 신천강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이세번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다가 1522년(중종 17)에 대정현 신도리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7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병을 얻어 제주에서 사망하자 병 간호를 위해 제주에 왔던 가족들이 제주에 정착함으로써 이세번고부이씨 입도조가 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모를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이익(李瀷)은 제주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고홍진·김징용·문영준 등 제자를 길러내어 제주 교육 발전에 막대한 역할을 행하였다. 이익(李瀷)이 제주에서 낳은 아들이 정착하여 경주이씨 국당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광해군 때에 제주에 유배된 김응주(金膺珠)는 제주에서 소실을 맞아 자손을 낳고 유배에서 풀리자 되돌아가는데, 김응주(金膺珠)의 아들은 제주에 남아 김해김씨 사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당시 김응주는 제주목사 김여수와 친척이었으므로 유배 생활 중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 인조반정으로 제주에 유배된 박승조(朴承祖)는 아들 박자호를 데리고 유배 생활을 하다가 유배가 풀리자 본인만 돌아갔다. 박승조(朴承祖)의 아들이 제주에 뿌리를 내려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한편, 밀양박씨 규정공파문중과 후손들은 박승조의 유배설에 대하여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쓴 연안부사박공묘지명(延安府使朴公墓誌銘)을 근거로 박승조가 제주에 유배를 간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 박승조가 선조대에 제주목 교수관으로 갔다가 제주에서 나주김씨를 만나 박자호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박자호가 제주의 입도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 왕족이었던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은 당시 심기원 등이 인조를 거부하고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데 당사자로 연루되어 1644년(인조 22)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645년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일찍이 이덕인(李德仁)의 서자 이팽형(李彭馨)이 현실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제주에 들어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아들을 낳아 전주이씨 계성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현종 때에 제주에 유배된 이지달(李枝達)은 서인과 남인의 예송 논쟁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제주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 이보운을 낳았다. 유배에서 풀리자 아들은 남기고 본인만 올라가게 되면서 이보운이 수안 이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숙종 때의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된 김예보는 유배에서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여 김해김씨 회의공 김경서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2.06 박자호의 출생지 수정 박자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므로 기존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출생'기록을 삭제함.
2012.02.02 밀양박씨 입도조 박자호 내용 보충 밀양박씨 규정공파문중에서 제출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 문중의 주장을 함께 실어 기존 주장과 시각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기에 문중의 주장을 보충함. 보충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편, 밀양박씨 규정공파문중과 후손들은 박승조의 유배설에 대하여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쓴 연안부사박공묘지명(延安府使朴公墓誌銘)을 근거로 박승조가 제주에 유배를 간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 박승조가 선조대에 제주목 교수관으로 갔다가 제주에서 나주김씨를 만나 박자호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박자호가 제주의 입도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 제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하고자 하시는 글이 있는 항목명과 해당 글의 첫머리를 알려주시면 삭제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2.09
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입도조 박승조(朴承祖)가 과연「연안부사박공묘지명(延安府使朴公墓誌銘)」속의 인물과 동일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과연 동명인이라면 집필자 선생님께서 어떤 자료를 근거로 삼으셨는지 여쭈어 보고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0.31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