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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도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692
한자 灰色陶器
영어음역 hoesaek dogi
영어의미역 gray stoneware
이칭/별칭 통일신라 토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기명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지도보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강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도기
제작시기/일시 고대|남북국시대|통일신라
제작지역 육지부 남해안 지방
재질 토제
문양 인회문|침선문|파상문|돌대문|격자문 등 다양
높이 그릇 종류에 따라 다양
소장처 국립제주박물관
소장처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261[일주동로 17]
소유자 국립제주박물관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시대의 도기.

[개설]

고내리식 토기 시기(500~900년)의 회색 도기류는 곽지리 3·4지구와 6·7지구 등에서 확인된다. 이 단계에 알려진 회색 도기는 통일신라 토기의 주요 기형인 평저 또는 굽이 달린 항아리와 반구병·나팔형의 세장경병이 주로 보인다. 따라서 기형을 볼 때, 일단 제주도의 고내리식 토기 시기의 회색 도기는 삼국 시대보다는 통일신라 토기의 범주에 들어갈 가능성이 많다.

다음으로 장식적 특징을 보면, 항아리 동체편에서 확인된 돌대 무늬는 통일신라기 토기에서 보이며, 삼국 시대 토기에는 드문 예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전기 토기에 흔한 인화 무늬 토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인화 무늬 토기는 경상도 지역의 횡혈식 석실분에서 출토되어 6~7세기경의 것으로 편년된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고내리식 토기와 공반하는 회색 도기는 통일신라 토기 중에서도 시기가 다소 떨어지는 8세기대 양식의 토기일 수밖에 없다.

[특징]

고내리식 토기 단계의 회색 도기의 기형과 형식적 특징의 일부는 백제 후기 토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반구병에는 짧은 목이 크게 팽창된 동체의 어깨로 이어지는 예가 있다. 이러한 형식은 전라북도 고창 운곡리 가마 등에서 출토된 백제 후기 토기 양식 중에서 확인된 바 있다.

세장경병도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부여 동남리 등지에서 출토되어 백제 토기와의 관계를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다. 또한 곽지 4지구 출토 동체부편의 파행 집선문도 부여 출토 사이부호의 무늬와 같다.

따라서 곽지리 3·4지구 출토 회색 도기군이 백제 말기 양식일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고내리식 토기 단계의 초기에 해당하는 토기 양식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형태]

고내리식 토기와 공반하지 않는 회색 도기군으로 제주시 용담동 유적 출토 예가 있다. 이 유적에서는 수천 점의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다. 이 토기군과 고내리식 토기 시기의 회색 도기군의 기형 및 형식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확인되지 않는다.

차이라면 백제 말과 통일신라의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전기의 인화 무늬 토기편이 몇 점 보이고, 작은 병형 토기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내리식의 적갈색 토기가 공반되지 않는 것은 혹시 그러한 시간적 차이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용담동 유적의 특징적인 성격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용담동 회색 도기군의 기종 및 형식과 비교가 되는 다른 지방의 예는 경상북도 경주 안압지와 전라남도 영암 구림리 가마에서 출토되는 통일신라기 도기 일괄이다. 우선 용담동 유적과 안압지 출토 예를 비교하면, 반구병·편병·세장병의 기종은 서로 통하지만, 안압지 유적에서 출토되는 개배·고배·평저의 완·바리가 용담동 유적에는 없다.

안압지 유적은 기본적으로 6세기 말부터 통일신라기 말인 9세기 말까지 지속된 유적으로 토기의 시간적 상한과 하한도 대체로 그와 맞물려 이해된다. 반면, 용담동 유적에서 후기 신라의 초기 형식의 인화 무늬 토기가 드물고 앞 시기의 기종이 없다는 것은 용담동 회색 경질 도기가 시기적으로 보다 늦거나 지역 또는 유적 성격의 다른 데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 전라남도 영암 지방의 구림리 가마에서 출토된 도기 일괄과 비교하면, 반구병의 기종·평저 또는 낮은 굽 달린 도기·세장형의 장경병·돌대 무늬 대호·편병류가 있는 점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영암에서는 주전자·시루·손잡이 달린 토기·평저 대접 등 식기용 그릇들이 출토되는데 비해, 용담동 유적에서는 이런 기종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장식 속성을 볼 때, 제주도에서는 인화무늬 토기가 소량이나마 보이는 반면에 영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이렇듯 양자 사이에는 안압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기적인 폭과 기간에 차이가 있거나 유적 성격상의 차이에서 상사성과 상이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용담동 유적에서 일괄 출토되는 도기류는 시기적으로 우선 안압지 출토 유물보다 늦고 영암 구림리 가마 출토 유물보다는 이른 시기의 것이면서 유적의 성격과 지역성이 이들과 다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에서 사용된 회색 도기는 기종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의 남한 지방에 비해 매우 제한적이다. 우선 곽지리식 토기 단계에는 작은 항아리뿐이었다. 고배와 같은 제의용 토기, 저장용의 큰 항아리, 주방용 시루형 회색 도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고내리식 토기 단계에서 수입된 기종에는 작은 항아리 외에 큰 항아리와 반구병, 세경병이 보이지만, 식기용의 대접 쟁반과 주방용의 시루가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 회색 도기의 수입은 제주도에서의 실용성 및 제의적 효용성에 따라서 기종이 선택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식기용 그릇이 수입되지 않은 것은 근대 민속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목기로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고, 시루가 없는 것은 제주도에서는 쌀농사가 발달하지 않은 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제의용 그릇이 없는 것은 제의 자체가 각 지역마다의 전통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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