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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598
한자 李時昉
영어음역 Yi Sibang
이칭/별칭 계명(系明),서봉(西峰),충정(忠靖),연성군(延城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목사
성별
생년 1594년(선조 27)연표보기
몰년 1660년(현종 1)연표보기
본관 연안(延安)
대표관직 서산군수|제주목사|공조판서|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형조판서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명(系明), 호는 서봉(西峰), 시호는 충정(忠靖). 아버지는 연평부원군 이귀(李貴)[1557~1633]이며, 영의정 이시백(李時白)[1581~1660]의 아우이다.

[활동사항]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가담하여 정사공신 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하였고, 1625년(인조 3) 서산군수를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에 피난하기에 앞서 순검사가 되어 먼저 강화에 가서 군비를 정비하고 왕이 도착한 뒤 8도의 군량미 조달의 중책을 맡았다.

1628년(인조 6) 광주목사로 남한산성 방어사를 겸하였으며 1632년(인조 10) 한성부의 좌·우윤이 되었고, 이어 인목대비가 죽자 국장도감과 산릉도감의 제조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나주목사를 지낸 후 전라도관찰사로 승진되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위급한 남한산성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정산(定山)[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40년(인조 18) 9월 제주목사 심연(沈演)[1587~1646]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642년(인조 20) 8월 떠났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641년(인조 19) 7월 제주도에 유폐된 지 6년 만에 광해군이 사망하자 모든 관리를 거느리고 소복으로 친히 염습하였다.

1642년(인조 20)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44년(인조 22) 광주수어사가 되었으나 회은군 이덕인(李德仁)[?~1644]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심기원(沈器遠)[?~1644]의 역모가 일어날 때 형 이시백과 함께 관계되었다는 흉서 사건으로 피해를 당하였다.

1645년(인조 23) 호조참판을 거쳐 1647년(인조 25) 병조참판과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며, 1648년(인조 26)에 공조판서를 지냈다. 1649년(인조 27)에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그 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에 재임할 때 호남지방에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고, 남한산성을 개수하다가 1660년(현종 1) 병으로 죽었다.

[저술 및 작품]

『서봉일기』가 있는데, 이시방의 생애를 주로 기록한 책으로 필사본이다. 이시방의 아들 이회(李恢)·이관(李慣)·이항(李恒)·이준(李懏) 중의 누군가가 편찬하였으나 정확한 편자는 알 수 없으며, 편찬 연대는 1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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